가라앉은 탑 · 목록

10화 · 11월 4일(수)

아버지의 바구니

몇 기둥을 더 지나자 벽 그림의 신발들이 하나씩 물 밑으로 들어갔다. 발끝이 먼저 잠기고 수놓은 발등이 잠기더니, 나중에는 옷자락 끝만 검은 물 위에 떠 있었다. 바닥이 그 아래로 꺼져 있다는 뜻이었다. 렌은 신발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닐은 이 길로 끝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렌의 어깨께에 오는 키로, 등불까지 들고서. 그렇다면 어딘가에 디딜 데가 있다는 얘기였다.

렌은 도른이 다가오던 모양을 되짚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그 사내는 기둥 하나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기둥 곁을 따라 걸었다는 뜻이었다. 복도 한가운데가 아니라.

렌은 한 발을 복도 가운데 쪽으로 밀어 보았다. 발끝 밑에 아무것도 없었다. 물이 발목을 감아 아래로 끄는 것 같아서 얼른 발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기둥 발치 쪽으로 밀었다. 돌이 닿았는데, 그냥 돌이 아니었다. 발바닥 밑에서 돌이 잎사귀 모양으로 갈라지고 말려 있었다. 천장을 받치던 기둥머리가 탑과 함께 뒤집혀, 이제는 기둥 발치에서 넓적한 돌꽃으로 물속에 피어 있는 것이었다. 꽃잎 끝을 발끝으로 더듬어 가자 거기서 발 하나 너비의 돌등이 물 밑으로 휘어 내려갔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쳐 있던 둥근 들보였다. 다음 기둥까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중간에 끊기지만 않았다면.

"내가 밟은 데만 밟아." 렌이 말했다. "밟을 데는 내가 불러 줄게."

못머리 물가에서 짐꾼들은 등짐을 진 채 널빤지를 건너 짐배에 짐을 싣는다. 널빤지가 휘청할 때 짐을 붙잡으려 들면 사람이 떨어지고, 짐이 기우는 쪽으로 무릎을 같이 꺾어 주면 짐도 사람도 산다. 렌은 그걸 어느 여름 내내 물에 빠지면서 배웠다. 머리로 배운 게 아니어서, 무릎은 지금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렌은 돌등 위에 발을 얹었다. 뒤꿈치부터 내리지 않고 발바닥 전체를 한 번에 놓았다. 등 뒤에서 바구니가 왼쪽으로 쏠리자 무릎을 왼쪽으로 조금 꺾었고, 바구니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좁아. 발 모아."

"네."

돌등은 기둥에서 멀어질수록 깊이 가라앉았다. 물이 허리를 넘고 갈비뼈를 넘더니 가슴께에서 멎었다. 바구니 밑바닥이 물을 먹었다. 맨 밑에 깔린 빵이 젖어 드는 것을 렌은 등으로 알았지만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런 데서 한번 멈추면 다시 떼기가 더 어렵다는 것도 널빤지에서 배운 것이었다. 에이린이 초를 든 팔을 한껏 뻗었는지, 렌의 그림자가 렌보다 앞서 수면을 미끄러져 갔다.

이윽고 돌등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물이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허리로 내려갔고, 발끝에 다음 돌꽃이 닿았다.

"넓어. 쉬어도 돼."

에이린은 쉬지 않았고 렌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기둥을 몇 개 더 건넜다. 기둥에 닿을 때마다 렌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음 돌등을 발로 찾았다.

마지막 돌꽃은 물 위에 드러나 있었다.

회랑의 끝자락은 다시 얕았다. 무릎까지 오는 물에 두 발을 딛고 서서야 렌은 고개를 들었다. 에이린이 곁에 와 서서 초를 쳐들었다.

기둥에는 청동 횃대가 박혀 있었다. 천인들이 불을 꽂아 두던 것이었을 텐데, 탑과 함께 뒤집혀 지금은 끝이 아래로 굽은 갈고리 꼴이었다. 거기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버들살이 물가에 오래 밀려 있던 나무토막처럼 잿빛으로 바래 있었다. 어깨끈 두 가닥이 횃대를 감았고, 바구니는 그 끈에 매달려 렌의 눈높이에서 조금 기운 채 멎어 있었다. 닐은 엄청 오래된 바구니라고 했다. 렌은 이 바구니가 몇 해를 묵었는지 알았다.

테두리 한쪽에, 손바닥 둘을 나란히 놓은 만큼이 다른 버들로 덧엮여 있었다. 거기만 살이 굵고 엮음새가 서툴렀다. 아홉 살 때 렌은 그 바구니에 걸터앉았다가 테두리를 부러뜨렸다. 아버지는 그날 밤 모닥불 옆에서 부러진 자리를 새로 엮었는데, 버들을 너무 굵은 걸로 골라서 끝까지 잘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삐죽 나온 버들 끝을 보며 웃었다. 바구니에 흉터 하나쯤은 있어야 남이 안 집어 간다고.

끈이 횃대를 감고 돌아와 묶인 자리는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렌이 아침마다 제 바구니에 짓는 매듭이었다. 마지막 꼬리를 왼쪽 아래로 밀어 넣는 데까지 같았다. 그 꼬리를 렌은 아버지 무릎 사이에 앉아서 처음 배웠다.

렌은 저도 모르게 제 어깨끈을 움켜쥐었다.

짐꾼은 바구니를 벗어 두지 않는다. 벗는 건 짐을 넘겨줄 때나 집에 돌아와서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걸 벗었다. 벗어서 물이 닿지 않는 높이에 걸고, 끈을 감고, 꼬리까지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쫓기는 사람이 지은 매듭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지은 매듭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바구니도 없이.

"아는 바구니예요?" 에이린이 물었다.

"우리 아버지 거."

에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섯 해 전에 들어왔어. 3층까지만 갔다 온다고."

말을 하고 나서야 렌은 그게 처음 입 밖에 내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바닥골목에서는 모두가 아는 일이라 따로 말할 데가 없었다. 에이린은 그래도 묻지 않았다. 대신 초를 바구니 옆으로 비켜 들었다. 제 그림자가 바구니 안으로 드리우지 않는 자리였다.

렌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남이 두고 간 것에는 손대지 않는다. 바닥골목에서 도둑질보다 먼저 배우는 규칙이었다. 아버지는 남이 아니라고 렌은 속으로 말해 보았다. 그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은 그래도 앞으로 갔다.

바구니를 덮은 천은 손이 닿자 젖은 재처럼 무너졌다. 그 밑, 바구니 바닥에 렌의 두 손을 합친 것보다 조금 큰 꾸러미가 묶여 있었다. 기름 먹인 가죽으로 싸고 끈을 열십자로 감은 것인데, 가죽은 어제 싼 것처럼 반들거렸다. 덮개 천이 저 꼴이 되는 동안 가죽에는 곰팡이 한 점 피지 않았다. 열십자가 만나는 자리에 납 봉인이 눌려 있었다. 렌은 그 각인을 알았다. 토빈이 이자 날마다 펼치는 장부 표지에 찍힌 것과 같은, 일레스 상회의 각인이었다.

끈에는 손가락 길이만 한 나무패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짐표였다.

상회 짐표에는 글 말고 금도 새긴다. 글 모르는 짐꾼도 제 등에 얹힌 값은 알아야 하니까. 긴 금은 백, 가운데 금은 열, 짧은 금은 하나. 렌은 엄지손톱으로 금을 짚어 갔다. 긴 금이 하나, 가운데 금이 셋. 짧은 금으로 넘어가다가 렌은 손톱을 멈췄다. 끝까지 짚어 볼 것도 없었다.

은화 백서른여섯 닢.

여섯 해 동안 토빈의 입에서 들어 온 수였다. 상회가 잃어버린 짐값이라며 아버지 이름이 적힌 차용증과 함께 내민 수, 렌이 이자 날마다 짐삯을 털어 메워 온 수. 상회는 짐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짐은 여기 있었다. 아버지가 매단 자리에, 봉인 한 군데 상하지 않고.

"뒤에 글이 있어요." 에이린이 초를 가까이 댔다. 불에 지져 쓴 글씨였다. "셋째 층. 내려놓을 것."

"받는 사람은."

에이린이 패를 뒤집었다가 다시 뒤집었다. "없어요. 그게 다예요."

짐꾼이 지는 짐에는 받는 사람이 있다. 짐꾼이 삯을 받는 까닭이 그것이다. 받을 사람이 없으면 그건 짐이 아니라 내다 버릴 물건인데, 버릴 물건에 그런 값을 매기는 상회는 없다. 일레스는 이것을 이 층에 내려놓게 하려고 아버지를 내려보냈다. 렌이 짐표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려놓지 않았다.

이 회랑의 물은 잠긴 것을 돌려주지 않았다. 책도, 부싯깃도, 도른도, 줄도. 아버지도 그걸 보았을 것이다. 보고서, 상회가 내려놓으라고 한 짐을 물이 닿지 않는 데 걸었다. 왜 그랬는지는 짐표에 적혀 있지 않았다.

꾸러미를 바구니 바닥에 붙들어 맨 끈도 아버지의 매듭이었다. 아버지가 지은 매듭을 렌이 푸는 건 처음이었다. 렌은 매듭을 지을 때의 순서를 거꾸로 밟았다. 꼬리를 빼고, 고를 늦추고, 감긴 데를 한 바퀴씩 되감았다. 손가락이 먼저 길을 알았고, 매듭은 제 바구니의 것을 풀 때와 똑같이 열렸다.

꾸러미를 들자 손목이 아래로 꺾였다. 크기에 비해 무거웠다. 이상한 건 그 무게가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렌이 꾸러미를 물 위로 옮기자 무게가 손바닥 밑으로 쏠렸다. 바구니 쪽으로 되돌리니 덜했다. 렌은 그걸 두 번 해 보지 않았다.

"넣어 줘." 렌이 등을 반쯤 돌렸다.

에이린이 렌의 바구니 속 물건들을 한쪽으로 밀고 꾸러미를 넣었다. 렌은 숨을 멈추고 그 무게를 받았다. 여섯 해 동안 장부에만 있던 무게가 이제 어깨에 있었다.

"이건요?" 에이린이 아버지의 바구니를 보았다.

"둬. 아버지가 건 거야."

렌이 몸을 돌렸을 때 에이린은 렌을 보고 있지 않았다.

에이린의 눈은 바구니 너머, 회랑의 끝에 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렌은 몰랐다. 매듭이 다 풀릴 때까지 촛불은 한 번도 바구니에서 비켜나지 않았으니까. 에이린이 그제야 초를 들어 그쪽을 비췄다.

회랑은 거기서 끝났다. 거꾸로 선 금빛 행렬은 모두 그 벽을 향해 걸어왔고, 그 벽 앞에서 끊겼다. 도른이 오래 절을 한 상대는 바구니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끝 벽에도 그림이 있었다. 천인의 금빛이 아니었다. 흙물 같은 물감을 거칠게 발라 그린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위에 있었다. 이 회랑에서 바로 서 있는 것은 렌과 에이린, 그리고 그 그림뿐이었다. 뒤집힌 탑 안에 바로 선 그림이라면, 탑이 뒤집힌 다음에 누군가 여기까지 내려와 그렸다는 뜻이었다.

"렌." 에이린의 목소리가 낮았다. "저기요."

줄 어딘가, 사람 하나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회칠로 하얗게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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