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11월 3일(화)
붉은눈
붉은 점 둘이 다가왔다.
닐의 등불은 한참 동안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불빛이 닿는 데까지 오고 나서야 점 둘 아래로 얼굴이 생겼고, 얼굴 아래로 어깨가 생겼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죽옷이었다. 둑길에서 카르스 용병들이 입고 있던 옷.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물속을 걷는 사람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팔로 물을 민다. 렌도 그렇게 걸었고 브란도 그렇게 걸었다. 이 사내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였다. 물이 사내의 배에 부딪쳐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사내가 지나간 뒤에야 놀란 듯 출렁였다. 왼손은 허리께에서 무엇인가를 쥐어 들고 있었는데, 손가락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둥 하나를 지날 때마다 사내는 고개를 한 번씩 숙였다.
"그림 속 사람들처럼 걸어요." 에이린이 숨으로만 말했다. "옷자락을 들고, 기둥마다 절을 하고."
사내는 불빛 끝에서 멈췄다.
"도른이다." 브란이 말했다. 사내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렌에게 일러 주는 소리였다.
렌은 바닥골목에서 붉은눈을 여럿 보았다. 용병 골목 어귀에서, 술집 문간에서. 흰자위에 핏발이 몇 가닥 선 눈들이었고, 골목 사람들은 그걸 두고 욕심 탓이라고도 하고 카르스 검 탓이라고도 했다. 도른의 눈은 그런 눈이 아니었다. 흰자위가 없었다. 눈동자도 없었다. 눈두덩 안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고르게 붉었다. 생선 장수가 상자 옆에 벌려 놓는 아가미 안쪽 같은 빛깔이었는데, 젖어 있어서 등불을 그대로 되비췄다. 닐이 저도 모르게 등불을 쳐들었을 때도 그 붉은 것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같은 모양을 같은 자리에서 되풀이했다. 렌은 그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글을 몰라도 그건 읽혔다. 못머리에서 자란 아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물은 허벅지 감각을 다 가져갈 만큼 찼다. 도른은 떨지 않았다.
"저게 다 먹힌 거야?"
"그래." 브란은 도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엔 자다가 그 말을 한다. 그다음엔 깨서 한다. 그다음엔 말이 사람을 한다."
렌은 저도 모르게 브란의 눈을 보았다. 흰자위를 덮은 붉은 그물이 등불 아래 또렷했다. 렌의 눈이 도른에게 갔다가 다시 브란에게 돌아왔다. 그물, 그리고 그물코가 다 메워져 더는 그물이라 부를 수 없게 된 것. 둘은 같은 길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그 길을 조금 더 걸어갔을 뿐이었다.
브란이 얼굴을 불빛 밖으로 조금 비켰다. "아직 멀었다."
렌은 묻지 않았다.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부터 나왔다는 건, 브란이 그 물음을 혼자서 여러 번 해 봤다는 뜻이었다.
도른의 고개가 돌아갔다. 기둥 앞에서 숙이던 그 느린 각도 그대로, 이번에는 닐 쪽으로. 닐이 반 걸음 물러섰고 등불 손잡이가 덜걱거렸다.
"불렀냐." 브란이 물었다.
"아까요. 한 번요." 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름만 불렀어요. 아저씨는 대답 안 했어요. 그 말만 했어요."
"그게 대답이다."
도른이 걸음을 떼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물이 길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고, 다음 순간 도른은 닐 앞에 있었다. 등불을 쥔 닐의 손목을 도른의 손이 감쌌다. 등불이 크게 흔들려 기둥과 벽과 거꾸로 선 신발들이 한꺼번에 미끄러졌다.
"한 층만 더."
도른의 목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런데 도른이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말이 그 목을 지나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도른은 닐을 끌고 안쪽으로 걸었다. 닐의 발뒤꿈치가 바닥을 긁었고 물이 닐의 가슴을 치받았다. 몇 기둥 앞에서 벽 그림 속 신발들이 물에 잠겨 있었다. 렌은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았다. 바닥이 거기서부터 내려앉는다. 닐의 키로는 몇 걸음 못 가 머리까지 잠기고, 이 물은 잠긴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
브란이 먼저 뛰어들었다. 도른의 어깨를 움켜쥐고 칼을 내리쳤다. 칼날이 팔뚝에 깊이 들어갔고 검은 물에 더 검은 것이 풀렸다. 도른은 그 팔로 닐을 계속 끌었다. 브란이 바닥에 발을 박고 버텼지만 셋은 한 덩어리가 되어 안쪽으로 밀려갔다.
렌의 손은 아직 물 위에 있었다. 종이를 쥔 채였다.
이걸 셔츠 안에 넣으면, 그다음부터는 브란이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 된다. 렌은 종이를 셔츠 안에 밀어 넣었다. 그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보지는 않았다.
허리의 매듭을 풀어 젖혔다. 여태 둘을 이어 온 줄이었다. 아까 정강이로 걷어찼던 쇠 등걸이가 에이린의 발치에 서 있었다. 렌은 어깨까지 물에 팔을 넣고 줄을 쇠 밑동에 두 바퀴 감았다. 골목 짐꾼들은 말뚝에 두 바퀴만 감으면 아이 손으로도 짐수레를 세운다고 했다.
"뒤로 기대. 눕는다 생각하고. 허리에 묶였으니까 손은 안 써도 돼."
에이린은 칼을 칼집에 꽂고, 초를 든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등을 뒤로 눕혔다. 줄이 에이린의 허리에서 쇠로, 쇠에서 렌의 손으로 이어졌다.
렌은 줄 끝을 쥐고 물을 헤쳤다. 줄이 쇠를 돌며 손바닥을 쓸고 풀려 나왔다. 브란의 등에 닿자 렌은 그 끝을 브란의 칼띠에 묶었다. 당기는 쪽으로는 조이고, 꼬리를 채면 한 번에 풀리는 매듭이었다. 짐꾼들이 등짐을 수레에 걸어 둘 때 쓰는 것으로, 짐이 굴러떨어질 때 사람까지 끌고 가지 않게 하려고 생긴 매듭이었다.
"버텨!"
줄이 물을 털고 떠올라 일직선이 되었다. 쇠가 바닥에서 앓는 소리를 냈고, 렌의 등 뒤에서 에이린이 짧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멎었다. 도른이 닐을 당기고, 브란이 도른을 붙들고, 줄이 브란을 붙들었다. 닐의 팔이 그 사이에서 끝까지 늘어났다.
"형, 팔이요. 팔."
브란이 도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려 했다.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손이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꿈이 쥐고 있었다. 브란이 칼을 들어 도른의 손목을 겨눴다가, 내렸다. 렌은 브란이 왜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손목을 잘라도 그 손은 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브란은 대신 도른의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그물과 붉게 다 찬 것이 한 뼘 사이에서 마주 보았다.
"한 층만 더." 브란이 말했다.
낮고 쉰, 아직은 브란의 목소리였다.
도른의 눈이 닐에게서 미끄러져 브란에게 가 앉았다. 닐의 손목을 감았던 손가락이 풀렸다. 닐이 뒤로 넘어지며 물을 먹었고, 렌이 닐의 바구니 끈을 잡아 끌어당겼다. 도른의 손은 이번에는 브란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안쪽으로. 브란은 버티지 않고 한 걸음을 같이 걸었다. 또 한 걸음. 물이 브란의 가슴께까지 왔고, 줄이 다시 팽팽해졌다.
"나리!" 닐이 소리쳤다.
다음 걸음에서 브란이 도른의 무릎 뒤로 발을 걸었다.
"여기까지다."
도른은 버티지 않았다. 내려가는 쪽으로는 한 번도 버텨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등부터 물에 몸을 뉘었다. 물보라도 일지 않았다. 브란의 옷깃이 찢어졌고, 멱살을 놓친 손이 물 위를 한 번 휘젓더니 브란의 허리에서 늘어진 줄을 움켜쥐었다.
줄이 물 밑으로 끌려 들어갔다.
브란의 허리가 꺾였다. 도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 물은 떨어진 것을 소리 없이 먹었는데, 먹히는 쪽이 놓지 않는 것까지 같이 삼키려 들었다. 브란의 턱이 수면에 닿았다. 렌은 한 팔로 닐을 끼고 다른 손을 브란의 칼띠로 뻗었다. 매듭 꼬리가 손가락에 걸렸다. 렌은 그것을 챘다.
매듭은 생긴 대로 한 번에 풀렸다. 줄이 브란의 허리를 떠나 물속으로 미끄러졌다.
뒤에서 쇠가 비명을 질렀다. 줄이 쇠 밑동을 돌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남은 한 끝은 에이린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렌이 돌아봤을 때 에이린은 이미 한 발로 쇠를 버티고 있었다. 촛불이 크게 기울었다. 남은 손에 칼이 나와 있었다. 칼날이 쇠에 감긴 줄 위로 떨어졌다. 한 번에는 끊기지 않았다. 두 번째에 줄이 갈라졌고, 잘린 끝은 쇠 밑동을 마저 돌아 물 밑으로 사라졌다.
물은 금세 판판해졌다.
닐이 기침을 했다. 렌은 닐의 손목을 더듬어 보았다. 부어오르고 있었지만 뼈가 어긋난 데는 없었다. 브란은 찢어진 깃을 한 손으로 여민 채 서 있었다. 닐이 등불을 들어 브란의 얼굴을 비췄을 때, 렌은 본 것을 못 본 것으로 해 두고 싶었다. 아까는 눈동자 가장자리에서 멎어 있던 붉은 실 한 가닥이, 왼쪽 눈동자 한가운데를 건너가 있었다.
브란은 그 눈을 어쩌지 않았다. 손을 대지도 않았다.
에이린의 허리에는 팔 하나 길이의 줄이 남아 있었다. 잘린 끝이 풀려 짐승 털처럼 일어나 있었다. 렌의 허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태 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에이린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다. 허리가 알려 주었다. 이제 허리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렌은 그게 빵 몇 덩이보다 아까웠다.
"줄값은 내가 진다." 브란이 말했다. "애 값도."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짐꾼 앞에서 진다는 말은 다르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애는 데리고 돌아간다. 나는 더 안 내려간다."
"서고로?"
"길이 그거 하나다."
닐이 렌을 보았다. 무엇을 물으려는 얼굴은 아니었다. 렌은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종이는 셔츠 안 살갗에 붙어 있었다. 찢고 다섯을 세면 닐은 이 물에서 나간다. 받은 짐은 내려놓을 때까지 렌의 것이었으니, 이건 렌이 정할 일이었다. 렌은 에이린을 보았다. 에이린은 줄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둘 다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브란도 꺼내지 않았다. 아까까지 그 종이를 내놓으라던 사람이었다. 렌은 브란이 진다고 한 것 안에 그 침묵까지 들어 있다는 걸 알았고, 셔츠 안이 그만큼 무거워졌다.
브란이 닐의 어깨를 잡아 계단 쪽으로 돌려세웠다. 닐은 두 걸음 가다가 돌아섰다.
"형. 저 안쪽 끝에요. 처음 내려왔을 때 아저씨가 거기까지 갔다 왔어요. 제가 등불 들고 쫓아갔거든요." 닐이 침을 삼켰다. "물 위에 바구니가 하나 걸려 있었어요. 기둥에요. 아저씨가 그 앞에서 한참 절을 했어요. 그다음부터 깨서도 그 말을 했어요."
"무슨 바구니."
"짐꾼 바구니요. 우리 골목 거 같은 거요. 엄청 오래된 거."
등불이 뒤집힌 계단을 감고 돌다가 기둥 뒤로 사라졌다. 남은 빛은 에이린의 초 하나였고, 그 빛은 회랑의 안쪽 끝까지 닿지 않았다.
짐꾼은 바구니에 이름을 쓰지 않는다. 글을 아는 짐꾼이 드물어서이기도 하고, 쓸 까닭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끈을 테두리에 붙들어 매는 매듭은 짐꾼마다 조금씩 달라서, 바닥골목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도 누구 바구니인지 안다.
렌은 아버지의 매듭을 눈을 감고도 묶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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