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탑 · 목록

8화 · 11월 2일(월)

잠긴 회랑

계단의 마지막 디딤판 밑은 물이었다.

렌은 모서리에 매달린 채 발끝으로 바닥을 찾았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허벅지가 다 젖고 나서야 발바닥에 단단한 돌이 닿았다. 물은 허리띠 바로 밑에서 멎었다. 렌은 허리를 앞으로 조금 꺾어 바구니 밑동을 수면 위로 띄웠다. 빵은 한 번 젖으면 그걸로 끝이다.

에이린이 뒤따라 내려섰다. 초를 든 손은 머리 위로 치켜든 채였다.

촛불이 비춘 것은 복도였다. 서고처럼 넓지는 않았다. 대신 길었다. 둥근 기둥이 양쪽으로 끝도 없이 늘어섰고, 기둥과 기둥 사이 벽마다 그림이 있었다. 금빛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 줄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림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거꾸로였다. 물 위로 나와 있는 것은 수놓은 신발과 발목, 옷자락 끝뿐이었고, 허리부터 머리까지는 검은 물 밑에 있었다. 신발 바닥들이 하나같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천 년째 거꾸로 선 채 걸음을 멈추지 않은 행렬이었다.

"궁정 회랑이에요." 에이린이 말했다. "왕좌로 가는 길이었겠죠. 원래는."

렌의 귀에 그 말은 반만 들어왔다. 3층이었다. 아버지가 다녀오겠다고 한 곳이 여기였다. 아버지도 바구니를 지고 이 물을 건넜을 것이다. 지금의 렌처럼 허리를 꺾고, 빵이 젖지 않게. 여섯 해 동안 렌은 이곳을 여러 번 그려 보았는데, 그 어느 그림에도 물에 거꾸로 잠긴 사람들은 없었다.

이상한 건 물이었다. 깨끗했다. 계단 사이사이에 물 먹은 책들이 걸려 있었으니, 천 년이면 그중 몇 권쯤은 여기로 떨어졌어야 했다. 조금 전 바구니에 쓸려 떨어진 책도 한 권 있었다. 그런데 수면에는 종이 한 장, 책등 하나 떠 있지 않았다. 렌은 팔을 물에 넣어 발치를 쓸어 보았다. 돌은 매끄러웠고 손끝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는 물이 바닥 노릇을 하는 모양이었다.

둘은 걷기 시작했다. 물속에는 쇠붙이가 고른 사이를 두고 솟아 있었고, 렌은 정강이로 하나를 걷어차고 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더듬어 보니 굵은 쇠테에 가지가 여럿 뻗은 등걸이였다. 천장에 매달려 초를 받치던 것이 지금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 서서, 가지 끝의 초꽂이를 모두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렌은 그다음부터 발을 들지 않았다. 바닥에 붙인 채 밀듯이 내디뎠고, 발등에 쇠가 닿으면 비켜 돌아갔다. 물을 헤치는 소리가 기둥 사이를 오가며 겹겹이 되돌아와서, 둘이 걷는데도 여럿이 걷는 소리가 났다. 그림 속 행렬은 모두 렌과 에이린이 가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에이린은 걸으면서 벽을 보았다. 물 위로 드러난 그림의 발치를 촛불로 하나하나 훑었고, 기둥을 지날 때마다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렌은 그게 무엇을 찾는 걸음인지 알았다.

"여기야? 셋째 줄."

"이 복도 어딘가요." 에이린은 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끝까지 가 봐야 알아요."

"끝이 어딘데."

에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둥은 불빛 밖으로도 한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어둠 저편에서 그 목소리가 아직 들렸다. 한 층만 더. 한 층만 더. 아까보다 멀었다.

복도 앞쪽에서 불빛 하나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양철 등에 든 노란 불이었다. 불빛이 길게 뻗어 와 촛불과 맞닿았다.

"누구예요?"

렌은 대답을 한 박자 늦췄다. 바닥골목에서 누구냐고 묻는 소리에 곧장 이름을 대는 짐꾼은 없다. 그 한 박자 사이에 저쪽이 먼저 알아보았다.

"렌 형? 렌 형 맞죠?"

닐이 물을 헤치며 다가왔다. 키가 렌의 어깨께까지 자랐고, 등에는 버들살이 아직 허연 새 바구니를 지고 있었다. 테두리 위로 천에 싼 것이 불룩했다. 닐은 웃고 있었다. 탑 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아이가 짓는 웃음이었다.

"할머니가 형 탑에 들어갔다고는 했는데, 여기까지 내려와 있을 줄은 몰랐어요. 토빈 아저씨는 형 줄에 뭘 또 적던데요."

바닥골목 장부의 한 줄이 여기까지 따라 내려와 있었다. 렌은 같이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등불이 닿는 끝에 사람이 하나 더 서 있었다.

브란은 다가오지 않았다.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그 자리에서 이쪽을 보았다. 둑길에서 한 번 본 눈이었는데, 등불을 정면으로 받은 지금 보니 그때 본 것이 다가 아니었다. 흰자위에 붉은 실이 그물처럼 얽혔고, 그물은 눈동자 가장자리까지 먹어 들어가 있었다.

"짐꾼." 브란이 말했다. 그게 인사였다.

렌은 닐에게 물었다. "혼자 온 거 아니지."

"나리하고요, 잠꼬대 아저씨하고, 오드 형하고요."

렌도 아는 이름이었다. 골목 우물가에서 늘 한쪽 어깨를 주무르던 마른 사람. 닐의 목소리가 그 이름에서 작아졌다. "오드 형은."

닐이 브란 쪽을 돌아보았다.

"서고에 두고 왔다." 브란이 말했다.

두고 왔다. 렌은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들었다. 바닥골목에서 그건 짐에 쓰는 말이었다. 무거워서 두고 왔다. 값이 안 나가서 두고 왔다.

"오드 형이 책 위에서 미끄러졌어요. 소리가 엄청 크게 났는데, 그다음에 그림자가." 닐이 입을 다물었다. 브란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닐은 대신 어둠 쪽을 가리켰다. "아저씨는 저리로 갔어요. 불도 없이요. 불러도 그 말만 해요."

"부르지 마라." 브란이 말했다. "대답하면 따라온다."

그러고 나서 브란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물이 브란의 허리 앞에서 갈라졌다.

"주문서."

에이린의 칼이 나왔다. 칼집이 물에 잠겨 있었으므로 칼날은 물을 한 줄기 끌고 나왔고, 칼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마다 촛불이 하나씩 맺혔다. "물러서세요."

브란은 칼끝을 보지 않았다. "아가씨는 칼이나 들고 있어라. 나는 짐꾼하고 얘기한다." 붉은 눈이 렌의 가슴께로 내려왔다. "아가씨가 주문서 한 장 없이 여기까지 내려왔을 리 없지. 귀한 건 짐꾼이 진다. 너희 골목 놈들은 그걸 꼭 셔츠 안에 넣더라."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닐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도 거기 넣는데."

"봐라."

"이건 받은 짐이야." 렌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알지. 그러니까 달라는 거다. 값은 쳐 주마. 나가서."

"나가서 누가 줘."

"카르스는 빚을 안 떼먹는다."

종이는 렌의 셔츠 안, 땀에 젖은 살갗에 붙어 있었다. 탑 문 앞 탁자에서라면 은화 열넷에 살 수 있는 종이였다. 여기서는 값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렌은 따졌다. 따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넘기면 브란은 혼자 나간다. 나가서 준다는 돈은 안에 남은 사람한테는 없는 돈이다. 렌과 에이린과 닐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고, 그 길에는 서고가 있고, 서고에는 오드를 가져간 그림자가 있다. 그래도 살아서 남는다. 안 넘기면 브란의 칼은 셀 것도 없이 가까웠다. 어느 쪽으로 따져도 셈은 같은 답을 냈다. 넘겨라.

무릎이 떨렸다. 물이 허리까지 차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 밑에서 무엇이 떨리는지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여덟 살 때 렌은 골목의 늙은 짐꾼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길에서 칼 든 놈이 짐을 내놓으라면 어떻게 하느냐고. 노인은 빈 담뱃대를 문 채 대답했다. 내놓지는 마라. 내려놔라. 내놓으면 그놈 짐이 되고, 내려놓으면 아무 짐도 아니게 된다. 렌은 그때 그게 말장난인 줄 알았다.

렌은 앞섶을 헤치고 종이를 꺼냈다. 세렌가의 각인이 찍힌 면이 촛불을 받아 희게 드러났다.

브란의 눈이 종이를 따라왔다. 닐이 숨을 삼켰다. 렌은 종이를 쥔 손을 브란 쪽으로 곧게 뻗었다. 내미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팔이 다 펴지자 렌은 그 손을 천천히 수면 쪽으로 내렸다. 종이 끝과 물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 남았다.

"한 발 더 오면 내려놔."

브란이 멈췄다. "종이는 뜬다."

"여기서 뭐 떠 있는 거 봤어?"

브란은 물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눈은 렌의 손에 둔 채였다. 대신 닐이 보았다. 등불이 수면을 한 바퀴 쓸었다. 검고 매끄러운 물과 거꾸로 선 신발들, 그것뿐이었다.

"나리." 닐이 작게 말했다. "아까 제가 떨군 부싯깃도요. 안 떴어요."

브란이 손목 안쪽으로 한쪽 눈을 문질렀다. 모래가 든 눈을 비비듯 거칠게. 손을 내렸을 때 그 눈은 아까보다 더 붉었다.

"네 손이 펴지기 전에 내가 그 손목을 잡으면."

렌은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조금 더 내렸을 뿐이다. 종이 귀퉁이가 물에 닿았다. 젖은 자리가 손톱만큼 번지며 검게 물들었다. 귀퉁이 한 점이 젖었을 뿐인데 렌은 제 살점 하나를 물에 담근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곁에서 에이린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브란도 굳었다. 반 걸음 내밀었던 발을 거기 둔 채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동안 렌은 제가 고른 것이 셈의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용기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무릎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 렌이 고른 것은 노인의 말이었다. 이 종이는 렌이 내려놓을 때까지 렌의 짐이었다. 브란이 할 수 있는 일은 렌을 죽이는 데까지였고, 죽은 손이 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브란은 한참 렌의 손을 보다가 내밀었던 발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딱 한 걸음이었다.

"좋다. 그 짐 계속 져라." 브란이 말했다. "그 손을 언제까지 들고 있나 보자."

닐이 아주 작게 물었다. "형, 진짜 놓을 거예요?"

"몰라."

정말 몰랐다. 꽃삽을 놓을 때는 찬 기운이 손가락을 먼저 풀어 놓았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렌의 손을 대신 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팔이 어깨에서부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렌은 그것을 얼굴에 내지 않았다. 닐은 등불을 든 채 렌과 브란 사이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도 한 발 옮기지 못한 채였다.

그때 렌은 귀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둠 저편에서 끊이지 않던 그 말이 끊겨 있었다. 언제 끊겼는지는 넷 중 누구도 몰랐다.

물결이 왔다. 복도 끝에서 밀려온 낮은 물결이 넷의 몸을 차례로 치고 지나갔다. 누군가 물속을 걷고 있었다. 물을 헤치는 느린 걸음이 아니었다. 물이 없는 데를 걷는 것처럼 빨랐다. 둘째 물결은 더 높았다. 물이 렌의 손등까지 튀어 올랐고, 렌은 종이를 쥔 주먹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브란이 칼을 뽑았다. 칼끝은 렌이 아니라 어둠을 향해 있었다.

닐이 등불을 그쪽으로 쳐들었다. 불빛이 닿는 맨 끝, 사람 눈높이에 붉은 점 두 개가 떠 있었다. 등불을 되받아 빛나는 그 점은 깜박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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