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11월 1일(일)
사서의 그림자
고개를 든 그림자에는 얼굴이 없었다. 둥근 머리 꼴만 책장 옆면에 먹물처럼 배어 있을 뿐, 눈이 있을 자리도 입이 있을 자리도 고르게 검었다. 그런데도 렌은 그것이 이쪽을 본다는 걸 알았다. 토빈이 골목 어귀에서 장부를 펴 들면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눈이 어느 줄에 멎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이 꼭 그랬다. 사람을 장부의 한 줄로 읽는 눈이었다.
에이린의 손에서 초가 가늘게 떨렸다. 렌이 고개를 아주 조금 젓자, 에이린은 초를 든 손을 그 높이에 그대로 붙잡아 두었다. 그림자는 통로 건너편에서 한참 둘을 향해 있다가, 읽던 데를 다시 찾는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렌의 오른발 밑에서 책 한 권이 꺾였다.
무게를 옮긴 것도 아니었다. 천 년을 눌려 있던 책등이 제풀에 부러졌고, 그 위의 종이가 길게 찢어졌다. 그 소리가 좁은 통로를 따라 저 끝까지 굴러갔다.
종이 한 장이 넘어갔다. 마른 손바닥끼리 스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림자는 한 칸 가까운 책장에 서 있었다. 사이의 옆면을 건너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저기 있던 것이 여기 있었고,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어깨에서 발치까지 긴 옷자락 꼴이 곧게 떨어졌고, 소매는 손등을 덮고도 남았다. 두 손에 펼친 것의 두께만 오른쪽으로 한 장 넘어가 있었다.
"소리가 나면 넘겨요." 에이린의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한 장에 한 칸씩."
렌은 대답 대신 발을 들었다.
바닥골목의 새벽 짐은 사람들이 자는 창 밑으로 지나간다. 깬 사람은 덧창을 열고 욕을 퍼붓고, 그 욕을 들은 짐 주인은 들은 만큼 삯을 깎는다. 그래서 골목 짐꾼들은 일찍부터 발 바깥날로 걷는 법을 익힌다. 발가락 끝으로 먼저 디딜 데를 더듬고, 단단하다 싶을 때에야 뒤꿈치를 내린다. 렌은 그 걸음으로 한 발씩 그림자에게서 멀어졌다. 에이린은 그렇게 걷는 법을 몰라서 흉내를 내다가 두 번 비틀거렸는데, 두 번 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양쪽에 매달린 책장마다 흰 돌 패가 붙어 있었다. 에이린은 걸으면서 그것을 입술로만 읽었다. 궁정의 의례. 궁정의 옷. 궁정에 드는 사람들. 렌은 그 글자를 몰랐으므로 다른 것을 보았다.
통로의 책장은 양쪽으로 열넷씩이었다. 한 칸을 더 지나 다시 세어도 열넷이었고, 어깨 너머를 한 번 보고 나서 세어도 열넷이었다. 서고에 든 뒤로 처음, 센 것이 센 자리에 가만히 있어 주었다. 렌은 그게 반가웠는데, 반가운 다음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방이 숨을 참고 있는 건 저것이 읽고 있어서였다. 다시 셀 수 있게 된 게 등 뒤의 그것 덕이라는 걸, 렌은 고맙게 여길 수가 없었다.
위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매달린 칸에서 저절로 빠진 책이 렌의 어깨를 스치고 책 더미 위에 둔하게 부딪쳤다. 곧장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뒤따랐다. 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촛불이 닿는 옆면 어딘가에 그것이 한 칸 더 다가와 섰다는 걸 알았다. 남은 책장은 다섯, 그림자와의 사이는 둘이었다.
"뛸까요."
"뛰면 한꺼번에 넘겨."
둘은 뛰지 않았다. 렌은 대신 걸음을 짧고 낮게 줄였다. 등 뒤에서 에이린의 숨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했다.
통로 끝에서 책 더미가 끊겼다.
바닥에 둥근 구멍이 나 있었다. 어른 여럿이 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설 만큼 넓었고, 가장자리에는 책들이 반쯤 걸쳐 있었다. 긴 세월 한 권씩 미끄러져 들어가고 남은 것들이었다. 구멍 한가운데로 돌기둥 하나가 아래로 뻗었고, 기둥에는 계단이 감겨 있었다. 디딤판은 모두 아래를 보고 있었다. 누가 나선 계단을 통째로 뽑아 뒤집어 매달아 둔 것 같았다.
"궁정으로 가는 계단." 에이린이 마지막 패를 읽고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천인들은 책을 읽다가 이리로 궁정에 갔나 봐요. 그때는 위쪽이었겠죠."
"지금은 아래야."
렌은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가장 가까운 디딤판이 팔 하나 길이 밑에 있었고, 뒤집힌 디딤판의 모서리는 손에 쥐기 좋게 닳아 둥글었다. 기둥을 끼고 돌면서 사다리처럼 하나씩 쥐고 내려가면 될 것이었다. 렌은 손을 뻗으려고 몸을 숙였다.
바구니가 앞으로 쏠렸다. 테두리 위로 비죽 솟아 있던 은 꽃삽 자루가 돌기둥을 쳤다.
땡.
맑은 쇳소리가 구멍 아래로 길게 떨어져 내려갔다. 렌의 머리 위에서 종이가 연달아 넘어갔다. 너무 빨라서 한 소리로 들렸다.
그림자는 돌기둥에 서 있었다.
촛불을 받은 기둥 한쪽 면, 렌의 얼굴에서 한 뼘 떨어진 자리였다.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에 펼친 것을 들고, 다른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사람 팔보다 몇 마디는 긴 팔 끝에, 펜으로 그은 획처럼 가는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그 손이 기둥을 타고 흘러 기둥에 비친 렌의 그림자 위로 번져 왔다. 어깨의 그림자, 어깨에 얹힌 바구니의 그림자, 바구니에서 비죽 나온 자루의 그림자.
검은 손가락이 자루의 그림자를 쥐었다.
바구니에서 꽃삽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잡고 천천히 뽑는 것처럼. 렌은 뒤로 팔을 꺾어 자루를 움켜쥐었다. 얼음을 쥔 듯 손바닥이 아렸고, 쥔 것이 꽃삽 하나가 아니라 물을 가득 채운 두레박처럼 무거웠다. 그 무게가 렌을 구멍 쪽으로 끌었다. 무릎이 책 더미 위에서 미끄러졌다. 허리의 밧줄이 팽팽해졌고, 줄 저편에서 에이린이 발을 버티는 것이 줄을 타고 전해져 왔다.
에이린이 초를 든 팔을 옆으로 크게 내뻗었다. 기둥 위의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쏠렸다. 렌의 어깨도, 바구니도, 자루도. 검은 손은 쥔 것을 놓지 않고 같이 쏠려 왔다. 불을 옮겨서 떼어 낼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
생각할 틈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꽃삽은 1층에서 건진 것이었다. 바구니에서 돈이 될 물건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꽃삽을 바구니에 넣은 뒤로 렌은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을 그려 보았다. 유물 시장에서 받은 은화를 토빈의 장부 위에 한 닢씩 올려놓는 장면. 토빈이 펜을 들었다가, 어디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얼굴.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렌은 바구니가 쏠릴 때마다 꽃삽 자루부터 더듬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쥔 힘이 젖은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렌은 남은 손으로 가슴 앞의 어깨끈 두 가닥을 한데 모아 끌어내렸다. 바구니가 등에 바짝 앉았다. 꽃삽은 내주더라도 바구니까지 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손을 폈다.
꽃삽은 구멍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손이 끄는 대로 옆으로 미끄러져, 가장자리 책 더미 사이로 드러난 남빛 바닥에 가 닿았다. 튀지도 않았고 소리도 없었다. 바닥이 물처럼 그것을 받았다. 자루가 먼저 잠기고, 날이 잠기고, 날 끝이 잠겼다. 꽃삽이 사라진 자리 둘레에서 금점들이 잔물결을 탄 듯 한 번 일렁이다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렌은 그 자리에 손바닥을 댔다. 단단하고 찼다. 손톱으로 긁어도 금박 한 조각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떼고도 손바닥의 찬 기운은 한참 가시지 않았다.
기둥의 그림자가 늘어뜨린 팔을 거두었다. 펼친 것 위로 손가락을 한 번 가로로 그었다. 장부에 줄을 긋는 손짓이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한 장, 아주 천천히 넘겼다. 다음 순간 그것은 기둥에 없었다. 통로 끝 책장에, 그 너머 책장에, 점점 먼 옆면에 고개 숙인 꼴이 한 번씩 비치다가 촛불이 닿지 않는 데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책장들이 다시 미끄러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방금." 에이린이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 냈다. "바닥이 먹었어요."
"탑이 먹은 거야."
바닥골목 늙은 짐꾼들은 그렇게 말했다. 탑에서 손을 떠난 것은 탑이 먹고, 먹은 것은 언젠가 뱉는다고. 다만 먹은 층에서는 뱉지 않는다고. 죽은 짐꾼의 바구니가 그 짐꾼이 가 본 적도 없는 층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골목에 몇 개나 떠돌았다. 렌은 그 소문들을 오래 믿지 않았다. 믿으면 따져 볼 것이 생겼으니까.
"얼마짜리였어요?"
"시장에 내면 은화 서넛."
에이린은 대답을 고르는 듯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것도 나중에 드릴게요."
"나중이 자꾸 길어진다."
에이린은 웃지 않았다. 렌도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렌이 먼저 내려갔다. 디딤판 모서리를 쥐고 몸을 구멍 안으로 늘어뜨리자 바구니가 어깨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발끝으로 다음 모서리를 찾고, 찾으면 손 하나를 내린다. 기둥을 끼고 반 바퀴씩 돌 때마다 버들살이 돌에 쓸렸고, 그때마다 렌은 몸을 굳혔지만 머리 위에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에이린은 초를 내주지 않았다.
"불은 제가 들어요."
"한 손으로 내려올 거야?"
"로웬가 사람은 한 손으로도 내려와요."
그 말대로 에이린은 한 손으로 내려왔다. 기둥을 돌 때마다 렌의 머리 위에서 촛불이 느린 원을 그렸고, 둘을 이은 밧줄이 그 원을 따라 기둥에 감겼다가 풀렸다.
아래로 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구멍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져 내린 책들이 디딤판 사이사이에 걸려 있었고, 깊이 갈수록 물을 먹고 부풀어 있었다. 그중 한 권이 바구니에 쓸려 빠지더니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둘은 매달린 채 굳었다. 한참 뒤에야 저 아래에서 책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머리 위에서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림자가 듣는 건 서고 안의 소리뿐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렌은 세지 않았다. 셀 수 있었는데도 그랬다. 셈이 맞는 데가 꼭 좋은 데는 아니라는 걸 렌은 방금 위에서 배웠다.
물소리는 그 뒤로도 그치지 않았다. 넓은 데 고인 물이 벽을 천천히 핥는 소리였다. 렌은 디딤판에 매달린 채 숨을 골랐다. 그 물소리 위로 다른 소리가 얹혔다.
"한 층만 더."
사내 목소리였다. 이루 할머니가 모닥불 앞에서 끌던 가락이 아니었다. 높낮이도 없이, 잠든 사람이 이를 갈듯 같은 말을 같은 자리에서 자꾸 되풀이했다. 한 층만 더. 한 층만 더. 머리 위에서 에이린의 손이 디딤판을 다시 움켜쥐는 기척이 났다.
그 말이 끊긴 틈으로 다른 목소리가 올라왔다. 더 가깝고, 더 앳되고, 숨이 찼다.
"나리, 이 아저씨 또 혼자 가요. 불도 없이요."
렌은 모서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목소리를 알았다. 여섯 해 동안 바닥골목 생선 상자 사이를 맨발로 뛰어다니던 목소리, 이루 할머니가 다음 대목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외쳐 버리던 목소리였다.
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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