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탑 · 목록

6화 · 10월 31일(토)

천인 서고

유리 안쪽에 물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불꽃은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 끝에서 손톱만 한 불이 곧게 서서, 젖은 쇠테에 노란빛을 얇게 바르고 있었다.

"가져가요." 에이린이 뒤에서 속삭였다. "초를 아낄 수 있잖아요."

렌은 손을 뻗지 않았다. 길에 놓인 짐은 떨어뜨린 것이면 주인이 찾으러 오고, 놓아둔 것이면 놓아둔 까닭이 있다. 어느 쪽이든 먼저 손댄 놈이 그 사연까지 지게 된다.

"누가 놓고 간 거야. 놓고 간 건 가지러 와."

무엇이 가지러 오는지는 둘 다 입에 담지 않았다. 렌은 쇠고리 안쪽이 반들반들 닳은 것만 눈에 넣었다. 둑길의 굽은 고리에 오래 걸려 있던 쇠가 저렇게 닳는다. 어젯밤 서른일곱째 고리가 비었다는 생각이 났지만, 렌은 그 생각을 등불과 함께 모퉁이에 두고 지나갔다. 돌아볼 때마다 노란 점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물길은 그 뒤로 한참 이어졌다. 바닥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물은 허리에서 허벅지로, 다시 무릎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에는 발목만 적시는 얕은 물 끝에 둥근 문이 하나 서 있었고, 물은 그 문턱을 넘지 않았다. 렌은 문 앞에서 바구니를 등으로 옮겨 졌다. 젖은 바짓가랑이가 종아리에 들러붙었다.

문 너머는 넓었다. 촛불이 닿는 데까지가 방이 아니라, 촛불이 닿지 않는 데까지가 다 방이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렌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책장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1층의 나무들처럼 밑동이 위에, 끝이 아래에. 사람 키의 몇 곱절이나 되는 책장들이 줄지어 거꾸로 드리워졌고, 그 끝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한 데서 멎어 있었다. 거꾸로 선 칸칸에 책이 빼곡했다. 다 붙어 있지는 않았다. 발밑이 온통 책이었다.

천 년 동안 한 권씩 떨어진 책들이 무너진 장작더미처럼 엇갈려 쌓여 있었다. 그 틈으로 바닥이 드러났다. 짙은 남빛에 금으로 점을 찍은 바닥이었고, 어떤 점들은 가는 금줄로 이어져 있었다.

"천장이에요." 에이린이 낮게 말했다. "원래는요. 천인들은 위를 보면서 책을 읽었나 봐요."

렌은 남의 하늘을 밟고 서 있었다. 금박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책 모서리에 긁힌, 낡은 하늘이었다.

그때 방이 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바람인 줄 알았다. 낮고 긴 소리가 방 안 어디서나 한꺼번에 났고, 그 소리를 따라 매달린 책장들이 앞으로 조금, 옆으로 조금 미끄러졌다. 발밑의 책 더미가 한쪽으로 스르르 쏠렸다. 소리가 다 빠져나가자 책장들은 처음과 다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렌은 첫째 줄 앞까지 걸으며 걸음을 셌다. 스물둘. 촛불 끝에 걸린 줄은 열하나였다. 숨이 한 번 지나간 뒤 문 쪽으로 되짚어 걸었더니 서른하나였다. 돌아서서 다시 걸었다. 열일곱. 줄은 아홉이었다가, 다음 숨에 열넷이 되었다.

렌은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없는 계단 한 칸을 디딘 것처럼 속이 쑥 꺼졌다. 처음 보는 데 들면 렌은 맨 먼저 셌다. 세어 두면 거기는 아는 데가 되었고, 아는 데서는 다리가 덜 떨렸다. 여기서는 세는 사이에 셀 것이 달아났다. 입속으로 하나를 웅얼거렸는데 둘이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세지 마세요."

"안 세면 뭘 봐."

"글자요."

에이린이 촛불을 들고 가장 가까운 책장 앞으로 갔다. 매달린 책장마다 옆면에 흰 돌 패가 하나씩 박혀 있었고, 패에는 물길 천장에서 본 것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에이린은 글자를 읽기 전에 검지로 허공에 획을 한 번 따라 그렸다.

"별 이름이에요. 이건 별 이야기, 그 옆은." 촛불이 다음 패로 옮겨 갔다. "별 이야기를 쓴 사람들."

숨이 지나갔다. 에이린은 바뀐 자리에서 다시 패를 찾아 읽었다. 별 이름, 별 이야기, 별 이야기를 쓴 사람들. 셋은 아까와 다른 데 서 있었지만 여전히 그 차례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자리는 바꿔도 차례는 안 바꿔요." 에이린의 목소리에 웃음 비슷한 것이 묻어났다. "누가 정해 둔 순서대로만 움직이는 거예요."

"그 글자는 어디서 배웠어."

"집에 책은 다 팔렸는데 글자는 못 팔았거든요."

에이린은 패를 하나씩 짚어 가며 걸었다. 별에서 별빛으로, 별빛을 마시는 법으로, 그 법을 정한 사람들로. 궁정 쪽 책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3층이 궁정 회랑이니 내려가는 길도 그 책들 곁에 있을 거라고. 있을 거라는 말은 숫자가 아니어서 렌은 그 말이 싫었다. 그보다 나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아서 더 싫었다. 짐꾼은 짐 주인 뒤를 따라가도 길만은 제 눈으로 본다. 렌은 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길까지 남의 눈에 맡겼다.

대신 발은 렌의 것이었다.

책 더미는 걷기 나빴다. 표지는 미끄러웠고, 펼쳐진 책을 디디면 종이가 찢어지며 발목까지 삼켰다. 렌은 몇 걸음 만에 요령을 찾았다. 표지 말고 책등을 밟는다. 무릎은 늘 조금 굽히고, 무게는 발바닥 한가운데에 싣는다. 에이린은 렌이 밟은 책등만 골라 밟았다. 렌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숨이 지나갈 때마다 둘 사이로 책장 하나가 끼어들 뻔했다. 렌은 바구니에서 밧줄을 꺼내 한 끝을 제 허리에, 다른 끝을 에이린의 허리띠에 맸다. 에이린 쪽은 고를 하나 남겨 묶었다. 고를 당기면 한 번에 풀리는 매듭, 물을 건너다 일이 틀어지면 짐은 놓고 사람만 건지라고 짐꾼들이 짓는 매듭이었다.

"내가 넘어지면 이거 당겨."

"넘어지면 붙잡아야죠."

"붙잡으면 같이 끌려와. 그러니까 당겨."

에이린은 고에 손가락을 한 번 걸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기겠다는 건지 알아들었다는 건지는 그 끄덕임만으로 알 수 없었다.

패를 따라갈수록 에이린의 걸음이 빨라졌다. 별빛의 책들이 끝나고 사람 이름이 줄줄이 적힌 패들이 나왔다. 황제들의 이름이라고 했다. 맨 끝 패의 이름은 렌도 알았다. 이루 할머니의 모닥불 앞에서 들은 이름, 세르반. 그다음 패 앞에서 에이린이 멈췄다.

"궁정."

에이린은 그 말을 낮추지 않았다.

목소리가 책장 사이를 한참 굴러갔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한 장이 아니었다.

매달린 칸칸에서 책들이 저절로 펼쳐지더니 종이가 한 장씩 떨어져 나왔다. 떨어지던 종이가 공중에서 반으로 접히고, 또 접히고, 끝이 뾰족하게 꺾여 날개가 되었다. 날개 안쪽에 글자 줄이 그대로 있었다. 접힌 자리가 머리였는데, 그 머리에 눈은 없었다.

종이 박쥐들이 내려왔다.

뺨이 따끔했다. 손등으로 훔치자 핏줄이 실처럼 묻어났다. 종이에 베인 자리였다. 한 장이면 아무것도 아니다. 머리 위에서는 책장 하나가 통째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에이린이 칼을 뽑았다. 칼날이 박쥐 하나를 갈랐다. 갈린 종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두 조각이 저마다 날개를 접더니 작은 박쥐 둘이 되어 다시 날았다.

"베지 마!"

에이린이 칼을 거두고 촛불을 품 쪽으로 감쌌다. 렌은 바구니를 등에서 반쯤 돌려 머리 위를 가렸다. 버들살에 종이 날개가 부딪는 소리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박쥐 하나가 바구니 밑으로 파고들어 렌의 가슴팍을 노렸다. 렌은 저도 모르게 셔츠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 밑에 밖으로 나가는 길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발밑이 먼저 움직였다.

책 더미가 왼쪽으로 쏠렸다. 세어서 안 게 아니었다. 등으로 알았다. 짐을 지고 비탈을 내려갈 때 바구니가 앞으로 쏠리기 직전이면 허리 아래가 먼저 안다. 그 느낌이 지금은 왼쪽에서 왔다. 책장들이 왼쪽으로 밀리면 오른쪽에 틈이 난다.

오른쪽, 궁정이라고 적힌 패 옆에서 책장 두 개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리로."

렌이 먼저 뛰었다. 책등에서 책등으로. 몇 걸음 못 가서 펼쳐진 책 하나가 발밑에서 찢어졌고, 렌은 무릎까지 책 더미에 빠지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구니 무게가 렌을 더 깊이 끌었다. 허리의 밧줄이 팽팽해졌다.

에이린은 고를 당기지 않았다.

촛불 든 손을 높이 쳐든 채, 에이린은 두 발을 책등에 버티고 다른 팔뚝에 밧줄을 감았다. 렌은 그 줄에 몸무게를 반만 실었다. 다 실으면 에이린까지 넘어온다. 반은 줄에, 반은 빠진 다리에. 책 더미가 무릎을 놓아주었다.

틈은 벌써 좁아지고 있었다. 사람 하나 빠지기에는 넉넉해도 바구니를 진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렌은 어깨를 비틀어 몸을 옆으로 세웠다. 바닥골목처럼 좁은 데서는 바구니 모서리를 먼저 밀어 넣고 몸을 그 뒤에 붙인다. 정면으로 들이밀면 테두리가 걸리고, 걸린 바구니는 사람을 붙잡는다. 책장 모서리가 버들살을 긁었다. 그리고 빠졌다.

렌은 돌아서서 두 손으로 줄을 감아쥐고 끌었다. 에이린이 틈으로 튀어 들어왔다. 바로 뒤에서 책장 두 개가 맞닿으며 둔한 소리를 냈다.

맞닿은 책장 너머에서 날개 소리가 한동안 들리다가 잦아들었다. 사락, 사락. 종이가 책 사이로 도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바구니 버들살에 끼어 있던 박쥐 하나도 날개를 접고 그냥 종이 한 장이 되었다. 렌은 그것을 빼내 책 더미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렌의 뺨에서 흐른 피가 턱 끝에 맺혔다. 에이린의 손등에도 가는 줄이 여럿 그어져 있었다. 밧줄은 아직 둘의 허리를 잇고 있었고, 고는 에이린의 손가락에 걸린 채 그대로였다.

"당기라니까."

"넘어진 게 아니었잖아요. 빠진 거죠."

렌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숨이 아직 가빴다.

에이린이 촛불을 들어 양쪽을 비췄다. 좁은 통로에 매달린 책장들이 모두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패를 달고 있었다. 궁정, 궁정, 궁정. 에이린이 길게 숨을 내쉬었고, 렌도 그제야 따라 내쉬었다.

두 사람의 숨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방은 다음 숨을 쉬지 않았다. 책장들은 제자리에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고, 매달린 칸에서는 책 한 권 떨어지지 않았다. 촛농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에이린이 촛불을 조금 옮겼다. 책장 옆면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함께 기울었다.

그림자 하나는 기울지 않았다.

통로 저편 책장 옆면에 길고 가는 그림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촛불이 흔들려도 그것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손에 무언가를 펼쳐 든 모양이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한 번 났다.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전체 회차

AI와 함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