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탑 · 목록

5화 · 10월 30일(금)

서른일곱

해가 탑 뒤로 넘어가자 이루는 소매에서 마른 갈대 한 줄기를 꺼냈다.

둑길 첫 기둥에 불이 들어왔다. 등불지기의 장대가 고리에서 고리로 옮겨 갈 때마다 물 위에 노란 점이 하나씩 늘었고, 이루는 불 하나에 매듭 하나를 지었다. 늘봄족은 셈을 머리에 두지 않는다. 머리에 둔 셈은 잠들면 흩어지지만 손으로 지은 매듭은 아침까지 남는다고, 이루는 숲에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배웠다. 그게 몇 해 전 일인지는 세어 본 적이 없었다.

빈 고리를 지날 때는 매듭 대신 손톱으로 갈대를 꾹 눌러 자국만 냈다. 일곱 기둥마다 하나씩, 자국은 여섯이었다.

등불지기가 맨 끝 고리에 닿았을 때 그 불은 한 번에 붙지 않았다. 탑 문 바로 앞이었다. 노란 점이 켜졌다가 사그라들고, 다시 켜졌다가 사그라들기를 몇 번 하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았다. 젖은 심지가 저런다. 호수 한가운데 둑길에서 등불이 젖는 건 비 오는 날뿐인데, 오늘은 하루 내내 맑았다. 마지막 매듭을 짓고 나서도 이루는 한참 그 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른여덟.

"렌 형은 왜 안 와요?"

모닥불 건너편에서 코흘리개 하나가 물었다. 렌이 앉던 벽 밑이 비어 있었다. 여섯 해 동안 렌은 저녁마다 거기 기대앉아 입속으로 등불을 셌고, 아이들은 그걸 놀리면서도 렌이 센 수는 믿었다. 오늘 그 수를 대신 센 사람은 이루였다.

"탑에 들었단다."

"짐 지고요?"

"짐 지고."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 골목에서 자란 아이들은 탑에 든 사람 이야기 끝에 무엇이 붙는지 다 알았다. 그래서 아무도 그다음을 묻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서 가죽 장정이 삐걱 펴지는 소리가 났다.

토빈은 불가까지 오지 않았다. 불빛이 장부에 닿을 만큼만 다가와 섰다. 장부 모서리마다 손때가 까맣게 앉아 있었다.

"아침에 둑길에서 봤다는 놈이 있더라고. 로웬가 계집애 바구니를 지고 가더라고."

"그랬다더구나."

토빈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장을 넘겼다. 이루는 사람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 펼친 장 아랫단에 줄을 그어 지운 이름이 하나 있었고, 그 밑에 렌의 이름이 있었다. 렌의 이름 밑은 비어 있었다. 토빈은 귀에 꽂았던 펜을 뽑아 렌의 줄 끝에 몇 자를 보탰다.

"뭘 적니."

"늦은 값. 스물넷째 날을 넘기면 하루에 구리 넷씩 붙는 거고."

"아직 안 늦었잖니. 늦은 값은 늦은 다음에 적는 거란다."

"늦은 다음엔 받을 사람이 없어."

토빈은 펜 끝으로 렌의 이름 밑 빈자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할매가 그 애 뭐 되는 건 아니고?"

"같은 불 앞에 앉았던 사이란다."

"그건 장부에 안 들어가." 토빈이 장부를 덮었다. 돌아서다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상회에서 그놈 들어간 날을 따로 적어 두라더라. 별일이지. 빚 장부에 날짜까지."

토빈이 골목을 빠져나간 뒤에도 이루는 그 말을 오래 쥐고 있었다. 빚쟁이는 돈을 적는다. 날짜를 적는 건 다른 셈을 하는 사람들이란다. 여섯 해 전 그날에도 누군가는 렌의 아비가 문턱을 넘은 날을 어딘가에 적어 두었을 것이다. 그 장부가 어느 집 서랍에 들어 있는지 이루는 알지 못했다.

횃불 셋이 반대쪽 골목에서 내려온 건 그 뒤였다.

맨 앞의 사내는 걸음이 컸다. 횃불을 받은 눈이 횃불보다 붉었다. 용의 꿈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눈이라고 늘봄족은 말하고, 사람들은 그냥 붉은눈이라 불렀다. 그 뒤로 사내 하나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따라왔는데, 입술이 쉬지 않고 달싹였다. 지나칠 때 이루는 그 소리를 들었다. 한 층만 더. 한 층만 더. 잠든 사람의 말을 깬 사람의 다리가 싣고 가고 있었다.

짐꾼은 둘이었다. 처음 보는 마른 사내 하나, 그리고 닐.

여섯 해 전 이 불 앞에서 손을 번쩍 들고 가문 이름을 외던 그 꼬마였다. 이제 열다섯이었고, 등에 멘 바구니는 버들 껍질을 벗긴 지 며칠 안 된 새것이라 아직 하얬다. 끈이 너무 길어서 걸을 때마다 바구니 밑이 엉덩이를 쳤다.

"닐."

"할머니!" 닐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저 선금 받았어요. 카르스가 일이에요."

"주문서는 받았니?"

"그건 나리들 거죠." 닐은 그 말이 우스운 듯 웃었다. "브란 나리는 주문서 같은 거 안 쓴대요. 걸어서 나온대요."

이루는 대답 대신 닐의 바구니 끈을 잡아 한 뼘을 접어 묶었다. 바구니가 등 한가운데에 붙었다. 닐이 어깨를 들썩여 보더니 고개를 꾸벅했다. 앞에서 붉은 눈의 사내가 돌아보지도 않고 손가락만 까딱했고, 닐은 뛰어갔다.

횃불 셋이 둑길로 들어섰다. 노란 등불 사이로 붉은 불 셋이 탑 쪽으로 점점 작아졌다. 사람은 넷이었다. 이루는 불이 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들어갈 때 센 수가 나올 때 맞는 일은 이 도시에서 드물었다. 그래서 이루는 나올 때의 수를 미리 세어 두지 않았다.

불가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이루를 쳐다봤다. 이루는 자기가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늘봄족 말로, 아주 낮게.

"그 노래 무슨 뜻이에요?"

"렌 형도 몰랐어요." 다른 아이가 거들었다. "렌 형이 모르는 건 우리도 몰라요."

이루는 갈대를 소매에 넣었다. 불빛 속에 아이들 얼굴이 하나씩 떠 있었다.

"못이 뽑히는 날."

"못이요?"

"저기 박힌 거. 하늘못이라고 했지. 용의 심장에 박힌 바늘 말이란다."

"그게 뽑히면요?"

"아픈 데가 낫지." 이루가 말했다. "너희 발바닥에 박힌 가시도 빼면 낫잖니. 박혀 있는 동안은 내내 쑤시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라면 다들 알았다. 맨발로 생선 상자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었다. 하나가 제 발바닥을 들여다보다가 하품을 했고, 그 하품이 불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노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루는 남은 반을 입 안에 넣어 두었다. 가시를 빼는 순간에는 누구든 펄쩍 뛴단다. 잠들어 있던 것도. 용이 일어나는 데까지가 한 줄이었지만, 오늘 밤 이 불 앞에서 아이들에게 줄 몫은 가시까지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생선 상자 사이에 웅크려 잠들자 이루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무릎이 먼저 소리를 냈다.

둑길 돌은 낮의 볕을 다 내놓고 차가웠다. 천 걸음 남짓한 길은 늘봄족 다리로도 짧지 않았다. 이루는 서두르지 않았다. 렌이라면 이 길을 걸음으로 셌을 것이다. 그 아이는 무서우면 셌다. 열두 살 때부터 그랬다. 셀 것이 없는 데서 그 아이가 무엇으로 버틸지 이루는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생각한다고 그 아이 다리가 덜 떨리지는 않을 테니까.

서른일곱째 기둥 앞에서 이루는 걸음을 멈췄다. 고리는 비어 있었다. 기둥 발치의 이끼가 넓적하게 두 군데 눌렸고, 눌린 자리에서 물가까지 긴 줄이 끌려 있었다. 이끼는 벌써 말라 있었다. 어젯밤 자국이었다.

이루는 거기서 탑 쪽을 보았다. 일곱 기둥 너머, 문 앞의 마지막 등불이 낮게 타고 있었다. 저녁에 한참 머뭇거리던 그 불이었다. 여섯 해 전 그 아이가 마흔둘을 세던 밤부터 몇 해에 하나씩 비던 고리였다. 그런데 어젯밤 서른일곱째가 비었고, 저녁에는 일곱 기둥 너머의 심지가 젖어 있었다. 이루는 처음으로 이 셈이 서두른다고 느꼈다.

이루는 마지막 기둥을 지나 탑 문 옆 돌계단 그늘에 앉았다. 유스틴의 탁자는 기름천을 덮어 둔 채였다. 문 안쪽 계단은 깜깜했고, 횃불 셋은 벌써 그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등 뒤에서 금빛 기둥이 솟았다. 호수가 한꺼번에 밝아졌다. 물결마다 금빛이 얇게 얹혔고, 마흔넷째 기둥의 그림자가 물 위로 길게 누웠다.

그 그림자 발치에서 물이 갈라졌다.

손이 먼저 나왔다. 사람 손바닥 둘을 이어 붙인 만큼 넓고, 물속에서 오래 불은 것처럼 허옜다. 손가락이 길었고, 금빛 속에서 보니 마디가 하나씩 더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얇은 막이 번들거렸다. 손은 기둥 발치의 돌을 짚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기둥 몸통에 가려 이루가 앉은 자리에서는 손목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등불이 꺼졌다.

바람은 없었다. 손은 고리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불이 먼저 꺼졌다. 한참 뒤에야 심지 탄 내가 이루 쪽으로 건너왔다.

그것이 물 밖으로 몸을 반쯤 끌어낸 건 그다음이었다. 어깨가 있었다. 사람 어깨만 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등과 얼굴을 덮었고,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실처럼 흘러내렸다. 그것은 기둥에 가슴을 기대고 팔을 길게 뻗어 꺼진 등불을 고리에서 벗겼다. 쇠고리가 굽은 고리를 빠져나가는 작은 소리가 났다.

이루는 숨을 쉬지 않았다. 숲에서 늘봄족은 사슴이 물을 마실 때 그렇게 한다. 숨은 나무에게 맡겨 두고, 저는 거기 없는 것처럼.

그것은 등불을 품에 안고 물로 돌아갔다. 첨벙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둥글게 번진 물결이 금빛을 흔들다가 잦아들었다.

이루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둑길을 거슬러, 멀리 바닥골목 쪽 첫 불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 나갔다. 서른일곱. 소매 속 갈대에는 매듭이 서른여덟 있었다.

이루는 매듭을 풀지 않았다.

그때 물 밑에서 노란 빛이 켜졌다.

마흔넷째 기둥 발치에서 사람 키 하나쯤 아래였다. 꺼진 채로 들려 간 불이 물속에서 다시 타고 있었다. 빛은 흔들리지도 않고 탑 밑동을 따라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루가 아는 한 그 아래로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었다. 오늘 아침 렌이 넘은 문턱은 빛이 지나간 자리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이루의 눈이 닿는 데까지, 빛은 꺼지지 않았다.

전체 회차

AI와 함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