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10월 29일(목)
돌판
렌이 손을 떼기도 전에 에이린이 긁개 날을 돌판 가장자리에 댔다.
"기다려."
"왜요."
"밑에서 뭐가 치잖아."
"그러니까요." 에이린이 긁개를 회칠 틈에 박았다. "치는 게 있으면 문이 있는 거예요."
렌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치는 게 있으면 치는 게 있는 거다. 문은 그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회칠 가루는 벌써 날리고 있었다.
회칠은 기둥 앞의 것보다 단단했다. 긁개가 지나갈 때마다 끽 소리가 났고, 떨어진 가루는 젖은 잎 위에서 금세 누렇게 번졌다. 에이린은 한 변을 끝내면 무릎으로 기어 다음 변으로 갔다. 손바닥이 긁개 손잡이에 쓸려 벌겋게 일어났는데도 그 손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다. 네 변이 다 드러나자 돌판과 바닥 사이에 머리카락만 한 틈이 생겼다. 긁개 날은 거기 들어가기에 너무 두꺼웠다.
에이린이 렌의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은 은 꽃삽이었다.
"그거 은화 셋은 받아."
"부러지면 둘은 받겠죠."
에이린이 얇게 닳은 날 끝을 틈에 대고 손바닥 밑동으로 손잡이를 쳤다. 꽃삽이 쑥 들어갔다. 천 년 전에 화분 흙을 뜨던 날은 돌 틈에 박혀서도 휘지 않았다.
"드는 건 내가 해."
렌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짐꾼은 허리로 들지 않는다. 허리로 든 짐은 한 번이고 다리로 든 짐은 평생이라고, 아버지는 렌에게 처음 바구니 끈을 매 주던 날 말했다. 렌은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꽃삽 손잡이 밑에 손가락 둘을 건 다음, 다른 손바닥을 돌판 옆 바닥에 댔다.
쿵.
울림이 손바닥을 빠져나가자마자 렌은 다리를 폈다. 다음 울림이 오기 전에 돌판을 바닥에서 떼어 놓고 싶었다. 무엇이 치는지 모르는 채로 그 위에 손가락을 걸어 두고 싶지는 않았다. 셋에 돌판 한쪽이 들렸고, 에이린이 그 틈에 두 손을 밀어 넣었다. 다섯에 돌판이 섰다. 여섯에 옆으로 넘어갔고, 잎 더미가 그것을 둔하게 받았다.
일곱에, 이제 아무것도 막지 않은 소리가 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쿵. 그리고 무거운 물이 출렁이는 소리.
구멍에서 찬 바람이 불어 나와 촛불을 눕혔다. 오래 비를 맞은 책 더미를 한꺼번에 펼친 것 같은, 눅눅한 종이 냄새가 바람에 실려 있었다.
구멍은 사람 하나가 어깨를 비틀어야 겨우 빠질 너비였다. 렌이 촛불을 기울여 안을 비췄다. 흰 돌계단이 벽을 따라 좁게 돌며 내려가고 있었다. 1층의 검은 돌과는 다른 돌이었다. 불빛을 받은 계단은 물에 씻긴 조개껍데기처럼 희었고, 얼마 내려가지 않아 검은 물에 삼켜졌다. 물은 계단 너머 둥근 천장 밑까지 차 있었다. 천장과 물 사이에 머리 하나 들어갈 틈이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에이린이 종이를 폈다. 이번에는 둘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바늘을 따라 물길로, 책들이 잠든 데까지."
"책."
"2층이요. 천인 서고."
렌은 대꾸하지 않고 등바구니 끈을 어깨에서 내렸다.
짐꾼은 바구니를 몸에서 떼지 않는다. 떼면 누가 가져간다. 렌은 여섯 해를 그 말대로 살았고, 잘 때도 끈 하나는 팔목에 감고 잤다. 바구니가 등에서 떨어지자 등이 갑자기 추웠다. 구멍에서 나온 바람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 주문서 모서리를 건드렸다.
"짐 내리기 전에 길부터 봐. 짐꾼은 그래."
렌은 벽에 등을 붙이고 옆걸음으로 구멍에 들어갔다. 계단은 발바닥 반만 한 너비였고 돌은 미끄러웠다. 몇 칸 내려가자 물이 발목을 덮었다. 렌은 거기서 멈추고 촛불을 물 쪽으로 내밀었다.
물속 계단 위에 손이 있었다.
손바닥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만큼 넓었다. 위층의 잎처럼 허옜고, 손가락이 너무 길었다. 마디가 사람 손가락보다 하나씩 더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 얇은 막이 물풀처럼 흔들렸다. 손목은 계단 아래 검은 물로 이어졌다. 그 너머까지는 촛불이 닿지 않았다.
손이 천천히 들렸다. 물 위로 손끝까지 다 나왔다가 계단 돌을 내리쳤다.
쿵.
튄 물이 렌의 정강이를 적셨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리는 뒤로 가자는데 등 뒤가 벽이었다. 촛불이 떨렸고, 떨리는 불빛이 그 손가락 끝에 닿았다.
손가락이 접혔다. 새끼손가락부터 엄지까지 하나씩, 바닥골목 아이들이 처음 수를 배울 때처럼.
그러고는 물러났다. 계단을 쓸며 뒤로, 검은 물 속으로. 긴 손가락이 마지막까지 돌에 끌렸다. 물결이 가라앉자 물속 계단에 자국이 보였다. 넓적하게 붙은 두 손바닥, 그 끝에 길게 끌린 줄. 오늘 아침 서른일곱째 기둥 밑에서 본 모양이었다.
일곱이 지났다. 그 두 배가 지났다.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렌이 구멍 밖으로 몸을 빼냈을 때 에이린은 칼을 들고 있었다. 렌이 없는 사이에 혼자 뽑은 칼이었다.
"뭐였어요."
"손." 렌은 젖은 정강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문질러도 찬 기운이 빠지지 않았다. "서른일곱째 기둥 밑 자국 있잖아. 그 손이야."
에이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다 칼끝을 내리고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길을 재는 얼굴이었다. 렌은 그게 더 싫었다.
"책들이 잠든 데." 렌이 말했다. "2층이네."
"네."
"셋째 줄은."
에이린이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또 반으로. 더 접히지 않을 만큼 작아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1층까지만이라고 한 거, 거짓말이었어요. 셋째 줄은 3층이에요. 궁정 회랑. 거기서 봐야 하는 게 있어요."
말이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바닥골목 모퉁이에서 부딪친 뒤로 에이린이 이렇게 매끄럽게 말한 적은 없었다. 외워 온 말이었다. 혼자 몇 번이나 해 본 말.
"빵은."
"하나씩이에요. 렌 하나, 저 하나. 엿새."
렌은 열두 개를 한 사람 몫으로 셌었다. 하루 둘씩 엿새. 1층에서 렌이 돌아서면 그다음은 에이린 혼자의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열두 개 안에는 처음부터 렌의 입이 들어 있었다.
"그럼 아무 짐꾼이나 됐겠네. 그 빵 먹을 사람."
"처음엔요."
렌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짐꾼한테 행선지를 속인 짐은."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발밑의 잎이 그 소리를 반쯤 먹었다. "그 자리에 내려놔도 돼. 아무도 뭐라 안 해. 알고 그랬지."
"알았어요."
"주문서 먼저 준 것도. 언제까지 따라올지는 렌이 정한다며. 정하라고 준 거 아니잖아. 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나갈 줄 알고 준 거지. 아니면 나가 버려도 네 탓은 아니게."
"둘 다요."
에이린은 거기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렌은 셔츠 안에서 주문서를 꺼냈다. 밀랍 봉인 양옆을 두 손으로 쥐자 양피지가 손가락 사이에서 팽팽해졌다. 에이린은 말리지 않았다. 손을 뻗지도 않았다. 둘 다 알았다. 이걸 찢고 다섯을 세면 렌은 밖이다. 둑길 바람 속, 유스틴의 탁자 앞. 젖은 정강이도, 마디가 하나 더 있는 손가락도 여기 남는다. 에이린과 함께.
셈은 금방 끝났다. 은화 열네 닢짜리 양피지는 반값에 팔아도 이자를 채운다. 3층은 붉은눈을 따라간 짐꾼도 셋에 하나가 안 돌아오는 데였고, 몰락한 집 막내를 따라간 짐꾼 이야기는 셀 것조차 없었다. 어느 쪽으로 세어도 찢으라고 나왔다.
셈이 끝난 자리에 숫자가 아닌 것이 남아 있었다.
열두 살 때, 탑 문 앞이었다. 아버지는 일레스 상회의 짐을 지고 문턱 홈에 한 발을 올린 채 돌아보았다. 그때 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가락 셋을 펴 보인 것만 남았다. 3층까지만. 그 뒤로 렌은 밤마다 둑길 등불을 셌다. 등불은 셀 수 있었고, 3층은 셀 수 없었다. 셀 수 없는 것은 안 보면 됐다. 여섯 해를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지냈다. 그 3층이 지금 발밑에 있었다. 두 층 아래.
오늘 밤 둑길 등불은 렌 없이 켜질 것이다. 누가 대신 세어 줄지 렌은 몰랐다.
렌은 주문서를 다시 셔츠 안에 넣었다.
"3층까지만이야."
말하고 나서야 그게 누구 말이었는지 알았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왜요?" 에이린이 물었다.
렌은 대답 대신 바구니에서 밧줄을 꺼내 테두리에 두 번 감았다. 에이린은 더 묻지 않고 잎 더미에서 꽃삽을 찾아 바구니에 도로 넣었다. 날 끝은 멀쩡했다.
렌이 먼저 내려갔다. 물에 잠긴 마지막 칸에 서자 물이 허벅지까지 찼다. 에이린이 구멍 위에서 밧줄을 조금씩 풀어 주며 바구니를 비스듬히 내려보냈다. 렌은 그것을 받아 머리에 이고 테두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빵은 젖으면 끝이었다. 비 오는 날 둑길 물웅덩이를 건널 때 바닥골목 짐꾼들이 하는 방식이었다. 목이 눌렸지만 아는 무게였다.
에이린이 칼을 칼집에 넣고 촛불을 들고 따라 내려왔다. 머리 위의 네모난 구멍으로 정원의 초록빛이 조금 새어 들다가, 몇 걸음 만에 끊겼다.
물길의 천장은 둥글었고, 흰 돌에 글자가 줄지어 새겨져 있었다. 에이린이 촛불을 들어 한 줄을 비췄다.
"여기서부터 목소리를 낮출 것."
에이린은 그 말을 정말로 낮게 읽었다. 렌도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천인들의 서고에도 들어오는 사람에게 하는 잔소리가 있었다.
물은 걸을수록 깊어져 허리에서 찰랑였다. 렌은 걸음마다 발끝으로 먼저 바닥을 더듬었다. 이 물 어딘가에 그 손이 있었다. 손이 발목을 잡으면 바구니부터 놓을지 몸부터 뺄지, 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다리가 멈췄다.
길이 왼쪽으로 꺾였다. 모퉁이 벽에, 물에서 한 뼘쯤 위로 좁은 턱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턱 위가 노랬다.
등불이었다. 둑길 기둥의 굽은 고리에 꿰는 쇠고리, 둥글게 부푼 유리. 여섯 해 동안 바닥골목에서 멀리 보며 세기만 하던 것이 손을 뻗으면 닿을 데 놓여 있었다. 쇠테는 아직 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심지만 말라 있었다. 그 끝에서 작은 불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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