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10월 28일(수)
뒤집힌 정원
마흔넷째 등불의 유리 안쪽에서 물방울 하나가 굴러 내려 젖은 심지에 떨어졌다.
렌은 탁자 쪽을 돌아봤다. 유스틴은 장부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렌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등불은 아직 고리에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등불을 두고 할 말은 없었다. 오늘 밤 바닥골목에서 세어 보면 알 일이었다. 오늘 밤 바닥골목에 있다면.
에이린은 벌써 문턱 너머 첫 계단에 서 있었다.
문턱 돌의 홈은 발바닥 하나가 꼭 들어갈 만큼 깊었다. 삼백 년 동안 짐꾼들이 같은 자리를 밟아 판 자국이었다. 렌은 홈을 밟지 않고 그 위로 넘었다. 아버지 발이 마지막으로 놓인 자리였다.
계단은 둥근 벽을 따라 돌며 내려갔다. 서른 칸쯤에서 바깥 빛이 끊겼다. 렌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초 한 자루에 불을 붙였다. 여섯 자루 가운데 하나. 예순 칸쯤에서 찬 쇠 냄새가 걷히고 다른 냄새가 밀려왔다. 젖은 흙, 그리고 단내. 과일 광주리를 한 달 묵혀 둔 것 같은, 달고 시큼한 냄새.
계단은 백스물여섯 칸이었다. 마지막 칸에서 렌은 촛불을 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천장에 숲이 있었다.
검은 흙이 천장을 통째로 덮었고, 그 흙에서 나무들이 거꾸로 자라 내려와 있었다. 줄기는 아래로 뻗었고 가지 끝은 사람 머리 높이에서 멈췄다. 잎은 생선 배처럼 허옜다. 해를 한 번도 못 본 잎이었다. 가지마다 쭈글쭈글한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단내는 거기서 났다. 벽 위쪽, 흙 천장 바로 밑에 좁은 창이 줄지어 있었는데, 창마다 유리 너머로 호수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침 해가 물을 지나 들어와 모든 것이 초록빛이었다. 창 하나를 커다란 물고기 그림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브란은 틀렸다. 천장에서 늘어진 건 나무뿌리가 아니라 나무였다.
"뒤집힌 정원이에요." 에이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바닥에 쌓인 잎이 소리를 먹었다. 잎은 발목까지 빠졌고, 밟으면 물이 배어 나왔다. "천인들 섬에 있던 정원이요. 섬이 뒤집히면서 흙째로 별바늘에 박혔대요."
"와 봤어?"
"두 번요."
"누구랑."
에이린은 대답 대신 망토 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잉크 글씨가 세 줄 있었다. 에이린은 첫 줄만 손가락으로 짚었다.
"문에서 왼손으로 벽을 따라, 기둥 마흔아홉." 에이린이 종이를 접었다. "두 번 다 마흔여덟이었어요."
렌은 왼쪽 벽을 봤다. 검은 돌벽에서 둥근 기둥들이 반쯤 몸을 내밀고 있었고, 기둥마다 이끼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렌은 벽을 따라 걸었다. 기둥은 세지 않았다. 걸음을 셌다.
첫째 기둥에서 둘째까지 아홉 걸음. 둘째에서 셋째까지 아홉 걸음. 촛불이 기둥 하나를 비출 때마다 이끼가 초록에서 검게 바뀌었다. 아홉, 아홉, 아홉. 스무 개를 넘기도록 셈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스물일곱째 기둥을 지났을 때 잎이 떨어졌다.
두 장. 렌의 어깨 앞이었다. 네 걸음 앞에서 또 두 장. 다시 네 걸음 앞에서 두 장. 바람은 없었다. 렌은 걸음을 세다 말고 잎을 셌다. 둘, 둘, 둘. 간격이 고르게 맞았다. 무언가가 천장의 흙을 밟고 걷고 있었다. 렌과 같은 쪽으로, 렌보다 조금 앞서서.
렌은 촛불을 천장으로 들었다.
거꾸로 선 나무 두 그루 사이에 그것이 있었다. 흙 천장에 네 발을 딛고, 등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개만 한 덩치였다. 몸은 엉킨 뿌리와 마른 잎으로 엮였고,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흰 꽃봉오리가 한 움큼 돋아 있었다. 눈은 없었다. 봉오리들이 촛불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꿈짐승. 바닥골목에서 천 번은 들은 말이었다. 용이 꾸는 악몽이고, 층마다 그 층이 무엇이었는지를 꾼다고 했다. 여기는 정원이었고, 정원에서 흙은 발밑에 있다. 저것에게는 천장이 땅이었다. 렌이 선 바닥은 하늘이었다.
"에이린."
렌의 목소리보다 그것의 앞발이 빨랐다. 뿌리 한 가닥이 채찍처럼 풀려 내려와 에이린의 망토 깃을 감았다. 에이린의 발이 잎 더미에서 떨어졌다.
"놔! 놔, 이거!"
에이린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칼은 반쯤 나오다 멈췄다. 에이린의 몸이 천장 쪽으로 한 뼘, 또 한 뼘 끌려갔다. 거꾸로 선 가지가 에이린의 뺨을 긁었다.
렌의 손이 셈보다 먼저 갔다. 바닥골목 모퉁이에서 한 번 해 본 일이었다. 대롱거리는 칼집 끝을 잡고, 쇠테가 찌그러진 쪽을 피해 비스듬히 기울였다. 칼이 쑥 빠져나왔다.
에이린이 칼을 휘둘렀다. 칼질보다는 팔을 내젓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날이 뿌리에 닿았다. 뿌리가 반쯤 끊기며 검은 물이 튀었고, 식초 냄새가 났다. 에이린이 잎 더미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촛불이 렌의 손에서 빠져 잎 속에 박혔다. 치익. 남은 빛은 창으로 들어오는 초록뿐이었다.
천장에서 뿌리가 다시 풀려 내려왔다. 이번에는 둘.
렌은 바구니에서 밧줄을 끌어냈다. 서른 발. 짐꾼은 눈을 감고도 짐 매듭을 맨다. 손은 떨렸지만 매듭은 떨리지 않았다. 렌은 고리를 지어 내려오는 뿌리에 던졌다. 첫 번째는 빗나갔다. 두 번째에 걸렸다. 렌은 밧줄을 당겨 고리를 조였다.
"잡아!"
에이린이 칼을 내던지고 밧줄을 잡았다. 그것이 천장에서 버텼다. 네 발이 흙을 움켜쥐었고, 흙덩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렌은 잎 밑의 돌바닥에 발뒤꿈치를 박았다.
"셋에. 하나, 둘, 셋."
둘이 한꺼번에 몸을 뒤로 던졌다. 천장의 흙이 한 아름 뜯겨 나왔고, 그것이 흙덩이와 함께 떨어졌다.
바닥에 닿자 그것은 물 밖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뒤집혔다. 네 발이 천장을 향해 버둥거렸다. 땅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하늘에 떨어진 짐승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버둥거림이 느려지고, 뿌리가 한 가닥씩 풀리고, 흰 봉오리들이 시들어 고개를 떨궜다. 단내가 빠르게 옅어졌다. 남은 것은 젖은 잎과 흙과 뿌리 한 무더기였다.
렌은 숨을 셌다. 열까지 세고 나서야 손가락이 밧줄에서 풀렸다.
무더기 속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렌이 흙을 헤쳤다. 손바닥 길이의 꽃삽이었다. 은이었다. 손잡이에 잔 별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날 끝이 얇게 닳아 있었다. 녹은 한 점도 없었다. 어제 저녁까지 누가 화분 흙을 뜨던 것처럼 깨끗했다.
천인 유물. 렌의 셈이 저절로 돌았다. 1층에서 나온 작은 것은 유물 시장에서 은화 셋에서 다섯. 유물 시장의 주인은 일레스 상회다. 일레스 상회에 팔고, 그 돈을 일레스 상회에 갚는다. 은화가 상회 문을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는 동안 렌의 손바닥에 머무는 시간은 한나절이 안 될 것이다.
렌은 꽃삽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건 렌이 잡은 거잖아요."
"주인 짐에 넣은 거야. 나중에 없어졌다는 소리 안 들으려면." 렌은 잎 속을 더듬어 꺼진 초를 찾아냈고, 밧줄을 사려 담았다. 그리고 바구니 안을 셌다. 물주머니 둘. 초 여섯, 하나는 한 마디 탄 것. 밧줄 한 사리. 긁개 하나. 빵 열둘. 꽃삽 하나.
부싯돌을 세 번 치고서야 초에 다시 불이 붙었다. 에이린은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가지에 긁힌 자리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칼을 주워 칼집에 넣으려다 또 걸렸다. 렌이 칼집을 기울였다. 칼이 들어갔다.
렌은 그것이 서 있던 천장 밑을 봤다. 그리고 벽을 봤다. 스물일곱째 기둥에서 다음 기둥까지 걸음을 셌다.
열여덟 걸음이었다.
아홉이 둘. 기둥 하나가 있어야 할 자리에 평평한 벽뿐이었다. 다른 벽처럼 검고 이끼가 끼어 있었다. 다만 이끼가 얇았다. 옆 기둥의 이끼는 손가락 한 마디 두께였는데, 여기는 손톱 두께도 안 됐다. 뿌리를 깊이 못 내린 이끼였다.
렌은 바구니에서 쇠 긁개를 꺼내 손잡이로 벽을 두드렸다. 옆 벽에서는 딱 소리가 났다. 거기서는 퍽 소리가 났다.
"회칠이야."
에이린이 긁개를 받아 들었다. 긁개 날이 이끼를 벗겨 냈고, 그 밑의 회칠을 긁었다. 누렇게 삭은 회칠이 비늘처럼 떨어졌다. 석회 냄새가 났다. 에이린은 긁고 또 긁었다. 손이 떨려서 날이 자꾸 미끄러졌다. 렌은 거들지 않았다. 주인의 일이었다.
회칠 아래에서 기둥이 나왔다. 둥글던 기둥을 누군가 앞쪽만 평평하게 쪼아 낸 다음 회칠로 덮은 것이었다. 쪼아 낸 자리 한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새김이 남아 있었다. 너무 깊이 새겨서 다 쪼아 내지 못한 자국이었다.
동그라미 하나. 그 한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꿰뚫은 바늘 하나. 바늘 끝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렌은 새김을 보다가 에이린의 망토 깃을 봤다. 에이린의 엄지가 벌써 거기 가 있었다. 바닥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봤을 때 렌은 실밥 자국에서 동그라미만 봤다. 지금은 보였다. 동그라미 안에 바늘땀 구멍이 위에서 아래로 한 줄 나 있었다.
"있었어." 에이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짜 있었어. 다들 없다고 했는데."
에이린은 한참 새김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그러다 망토 소매로 눈가를 한 번 훔치고 말을 고쳤다.
"있었네요."
렌은 촛불을 들고 남은 벽을 끝까지 돌았다. 아홉 걸음씩 스물한 번. 계단 밑으로 돌아와 셈을 맞췄다. 스물일곱, 평평한 기둥 하나, 스물하나. 마흔아홉. 남이 센 숫자는 제 발로 다시 세기 전에는 렌의 숫자가 아니었다.
돌아와 보니 에이린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새김의 바늘은 동그라미 밖으로 빠져나와 기둥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쪼아 낸 자국 사이로 가는 선이 남아 있었고, 선은 잎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렌이 무릎을 꿇고 잎을 헤쳤다. 젖은 잎이 세 겹, 네 겹. 그 밑에서 돌바닥이 나왔다.
기둥 발치에 네모난 돌판 하나가 박혀 있었다. 사방 두 뼘. 바늘의 선은 돌판 한가운데까지 이어졌다. 돌판 네 가장자리는 회칠로 메워져 있었다.
에이린이 종이를 다시 펴서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소리 내어 읽지는 않았다.
"렌. 빵이 열두 개인 건요."
"알아." 렌이 말했다. "엿새치."
에이린이 입을 다물었다. 렌은 셔츠 안의 주문서를 생각했다. 한 장. 한 사람. 몸에 지닌 것까지.
렌은 손바닥을 돌판에 얹었다. 돌은 차고 축축했다. 회칠 틈에서 물풀 냄새가 났다. 그 밑에 호수 바닥의 진흙 냄새.
손바닥 밑에서 소리가 났다.
쿵.
렌은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쿵.
한 번 더 셌다. 일곱에서 또 울렸다.
돌 밑에서도 무언가 세고 있었다.
AI와 함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