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10월 27일(화)
둑길
둑길은 짐을 지고 천백일흔 걸음이었다.
렌은 그 숫자를 열두 살에 처음 셌고, 그 뒤로 하루도 빼지 않고 다시 셌다. 셀 때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면 고개가 들리지 않는다. 여섯 해 동안 렌이 본 둑길은 발밑의 돌과 앞사람의 뒤꿈치가 전부였다.
에이린의 짐은 가벼웠다. 둑길 짐의 반의 반도 안 됐다. 바구니 끈이 어깨를 파고들지 않았다. 그래서 렌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둑길을 걸었다.
둑길은 수레 두 대가 겨우 비켜 가는 너비였다. 양옆에 무릎 높이의 돌난간이 있고, 난간 너머는 바로 물이었다. 아침 호수에서는 생선 비린내 대신 찬 쇠 냄새가 났다. 바닥골목 사람들은 그걸 탑 냄새라고 했다. 길 끝에 탑 밑동이 서 있었다. 둥글고 검은 돌. 밤이면 노랗게 빛나던 창들이 낮에는 그냥 뚫린 구멍이었다.
스물일곱 걸음마다 쇠기둥이 하나씩 서 있었다. 기둥 꼭대기의 굽은 고리마다 유리 등불이 걸려 있었고, 낮이라 불은 꺼져 있었다.
첫째 기둥에는 등불이 있었다. 둘째 기둥에는 없었다.
빈 고리가 붉게 녹슬어 있었다. 오래된 빈자리였다. 렌은 밤마다 바닥골목에서 등불을 셌지만, 거기서 보이는 건 물 위에 줄지어 뜬 노란 점이었다. 점은 셀 수 있어도 어느 자리가 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몰라도 됐다. 렌은 세기만 했으니까.
"몇 개예요?" 에이린이 물었다. 칼집 끝이 돌바닥에 끌려 딸그락거렸다.
"세는 중."
아홉째 기둥이 비어 있었다. 둘째에서 거기까지 백여든아홉 걸음.
열여섯째 기둥이 비어 있었다. 아홉째에서 백여든아홉 걸음.
렌은 걸음을 늦췄다. 셈이 딱 맞아떨어지면 기분이 좋아야 했다. 이 셈은 그렇지 않았다.
스무째 기둥 밑에 사람이 셋 있었다.
둘은 난간에 걸터앉았고, 하나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셋 다 무릎 아래가 젖어 있었다. 바짓단에서 떨어진 물이 돌 틈에 고였는데, 색이 묽은 녹물 같았다. 곁에 불룩한 자루 넷이 놓여 있었다. 짐꾼은 없었다.
렌은 가운데 사내를 알았다. 용병 골목의 브란. 카르스가에서 일을 받아 탑에 드는 용병이었다. 지난봄 짐꾼 넷을 데리고 탑 문으로 들어가 둘을 데리고 나왔다. 그날 렌은 문 앞에 짐을 내려놓다가 그 숫자를 셌다.
브란이 고개를 들었다. 눈알의 흰자위가 덜 마른 녹처럼 붉었다. 붉은눈. 용의 꿈에 먹힌 사람은 눈부터 물든다고 했다. 카르스가 사람들 중에 그런 눈이 가장 많았다.
기둥에 기댄 사내는 자고 있었다. 눈을 뜬 채였다. 붉은 눈알이 아침 해를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깜박이지 않았다.
"등불 세는 놈." 브란의 목소리는 젖은 자갈을 밟는 소리 같았다. "렌이지."
렌의 다리가 멈췄다. 멈추고 싶지 않았는데 멈췄다.
"새벽에 둘 잃었다." 브란이 자루를 발로 툭 찼다. 안에서 쇠붙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해 지면 다시 들어간다. 3층. 은화 여덟, 선금."
브란이 가죽 주머니를 열어 젖은 손바닥에 은화를 쏟았다. 여덟. 햇빛이 은화마다 하나씩 앉았다.
렌은 셈을 했다. 하지 않으려 해도 셈이 먼저 했다. 여덟이면 이자 모자란 두 닢을 오늘 채우고, 늦은 값도 안 붙고, 여섯이 남는다. 다음 달 이자에서 한 닢만 모자란다. 그리고 렌이 여섯 해 동안 문 앞에서 센 바로는, 붉은눈을 따라 들어간 짐꾼은 셋에 하나가 나오지 않았다.
셋에 하나. 그리고 3층.
아버지가 간다던 데가 3층이었다.
"제 짐꾼입니다."
에이린이 렌 앞으로 나섰다. 칼자루에 손을 얹었지만 뽑지는 않았다. 뽑히지 않는다는 걸 이제 알았다.
브란의 붉은 눈이 에이린의 망토 깃으로 갔다. 실밥 자국에서 오래 머물렀다.
"로웬." 브란이 호수에 침을 뱉었다. "1층에 뭐가 있다고. 천장에서 나무뿌리나 늘어진 데다."
"그건 내가 정해." 에이린이 말하고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제가 정합니다."
브란은 에이린을 보지 않았다. 렌을 봤다. 은화를 쥔 손이 렌 쪽으로 반 뼘 다가왔다.
렌은 등바구니 끈을 두 손으로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서 끈이 미끄러웠다.
"짐 받았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받은 짐은 내려놓을 때까지 내 거야."
짐꾼 자리의 규칙이었다. 짐을 받은 짐꾼은 더 비싼 짐이 와도 받은 짐을 먼저 진다. 그걸 어긴 짐꾼에게는 다음 날부터 아무도 짐을 주지 않는다. 렌은 그 규칙을 지키다 손해 본 날을 셀 수 있었다. 지금이 스물세 번째였다.
브란이 주먹을 쥐었다. 은화가 손 안으로 사라졌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브란은 고개만 끄덕였다.
"셈 잘하는 짐꾼은 오래 못 간다." 브란이 말했다. "발밑만 세다가 위를 못 봐."
렌은 대꾸하지 않고 걸었다. 에이린이 따라왔다. 열 걸음쯤 갔을 때 등 뒤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브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 층만 더."
렌은 돌아봤다. 기둥에 기댄 사내가 여전히 눈을 뜬 채 자고 있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한 층만 더. 한 층만 더. 브란이 그 입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여러 번 해 본 손짓이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에이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너 때문 아니야. 규칙이야."
"알아요." 에이린은 한참 걷다가 덧붙였다. "그래도요."
무서울 때 렌은 더 꼼꼼히 셌다.
스물셋째 기둥이 비어 있었다. 열여섯째에서 백여든아홉 걸음. 서른째도 비어 있었다. 또 백여든아홉 걸음.
서른일곱째 기둥 앞에서 렌은 섰다.
고리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녹슬지 않았다. 아침 해를 받아 반짝였다. 어젯밤까지 등불이 걸려 있던 고리였다. 렌이 센 서른아홉 개 가운데 하나.
기둥 밑 돌바닥에 물 자국이 있었다. 난간에서 기둥까지 한 줄, 기둥에서 다시 난간까지 한 줄. 사람 발자국은 아니었다. 손바닥 두 개를 붙여 놓은 것처럼 넓적하고, 끝이 길게 끌려 있었다. 해가 뜬 지 한참인데도 마르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냄새를 맡았다. 물풀 냄새. 그 밑에 호수 바닥의 진흙 냄새.
"몇 개예요?" 에이린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낮았다.
렌은 남은 일곱 기둥을 끝까지 눈으로 짚었다. 서른여덟째부터 마흔넷째까지 모두 등불이 걸려 있었다.
"서른여덟."
에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지로 망토 깃의 실밥 자국을 한 번 쓸었다.
탑 문 앞에 접이 탁자 하나가 펴져 있었다. 탁자 위의 칠판에 분필 글씨가 있었다. 귀환 주문서 한 장 은화 열넷. 탁자 뒤에는 세렌가의 젊은 필경사 유스틴이 앉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잉크가 배어 검었다. 여섯 해 동안 렌은 이 탁자 옆에 짐을 내려놓았지만 유스틴이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작년엔 열둘이었어." 렌이 말했다.
"올해는 열넷." 유스틴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 장에 한 사람. 몸에 지닌 것까지. 수레는 안 됨. 찢고 다섯을 세는 동안 맞으면 길이 닫힘. 무를 수 없음."
유스틴이 상자에서 주문서 한 장을 꺼냈다. 손바닥 두 개 길이의 두꺼운 양피지에 밀랍 봉인이 찍혀 있었다. 유스틴이 그걸 해 쪽으로 들어 보였다. 별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바늘로 뚫은 구멍들이었다. 구멍마다 햇빛이 새어 나와 하나하나가 작은 별이 됐다. 렌은 버릇처럼 세다가 그만뒀다. 너무 많았다.
에이린이 망토 안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탁자에 엎었다. 은화가 쏟아졌다. 테두리가 다 닳은 옛 은화들이었다.
에이린이 셌다. 입술을 달싹이며 하나씩 옆으로 밀었다.
"열셋." 에이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열셋이에요. 어젯밤엔 분명히."
"열넷." 렌이 말했다. "넷째하고 다섯째가 겹쳐 있었어. 한 번에 밀었잖아."
렌이 겹친 두 닢을 손톱으로 떼어 놓았다. 에이린이 다시 셌다. 열넷이었다.
유스틴이 은화를 한 닢씩 저울에 올리고 장부에 적었다. 에이린이 주문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대로 렌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양피지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은화 열네 닢의 무게가 아니었다.
"너는."
"저는 걸어서 나올 거예요."
"1층까지만이라며. 1층이면 다 걸어서 나와. 주문서 없이."
"그러니까 그건 렌 거예요." 에이린이 빈 주머니를 접어 넣었다. "돈은 나중에라고 했잖아요. 이게 지금 줄 수 있는 거예요. 삯은 하루치를 주면 하루만 따라오잖아요. 이건 아무 때나 찢으면 돼요. 언제까지 따라올지는 렌이 정해요."
렌은 셈을 했다.
열네 닢이면 1층 짐꾼 삯 이레치였다. 돌계단의 열한 명 누구에게 내밀었어도 따라왔을 돈이었다. 유물 시장에 내다 팔면 반값은 받는다. 일곱 닢이면 이자를 채우고도 남는다. 셈 빠른 짐꾼이라면 1층에서 나오자마자 이걸 들고 시장으로 갈 것이다. 에이린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엿새치 빵. 이레치 삯.
"빵은 왜 열두 개야."
"배가 자주 고파서요." 에이린은 턱을 내리지 않았다.
렌은 주문서를 셔츠 안에 넣었다. 아침에 은화 다섯 닢이 들어 있던 자리였다. 양피지 모서리가 갈비뼈를 찔렀다.
탑 문은 열려 있었다. 문턱 돌에 발에 닳은 홈이 패어 있었고, 그 너머로 내려가는 계단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안에서 젖은 흙냄새가 새어 나왔다. 에이린이 먼저 문턱 앞에 섰다.
렌은 그 뒤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들 수 있었다.
마흔넷째 기둥은 탑 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둑길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렌은 머릿속으로 빈 고리를 처음부터 다시 짚었다. 둘째, 아홉째, 열여섯째, 스물셋째, 서른째, 서른일곱째. 여섯 자리가 모두 일곱 칸씩 떨어져 있었다. 서른일곱째에서 일곱 칸을 더 가면.
렌은 머리 위의 등불을 올려다봤다.
유리 안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바깥은 바싹 말랐는데 안쪽에만. 심지는 젖어서 검게 늘어져 있었고, 등불 바닥에 물풀 한 가닥이 감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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