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탑 · 목록

11화 · 11월 5일(목)

일곱째

그림 속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흙물을 손가락에 찍어 문지른 듯한 굵은 선이었다. 얼굴에는 눈도 입도 없이 둥근 테두리만 있었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팔이 옆 사람의 팔과 맞닿아 한 줄로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다리 한쪽이 짧았고 어떤 사람은 팔꿈치가 엉뚱한 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림을 그려 본 적 없는 손이 서둘러 그린 그림이었다. 사람마다 남은 한 손에는 무엇인가를 들었다. 에이린이 초를 옮겨 가며 그것들의 이름을 댔다.

"왕관 조각. 망치. 주머니." 촛불이 하얀 데를 건너뛰었다. "말아 쥔 건 별지도, 손바닥에 점 하나 얹은 건 씨앗. 이건 칼이고요. 천인이 그린 게 아니에요. 처음 내려온 사람들이 저희 손으로 그렸을 거예요."

바닥골목 아이들이 모닥불 앞에서 입을 모아 외는 그 여섯이었다. 렌은 그 이름들이 처음에는 이렇게 서툰 손가락 그림으로 남았다는 게 이상했다. 맹약관 벽에 걸린 커다란 벽화 얘기만 들어 왔으니까.

회칠은 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흙물 그림보다 한결 희었다. 나중에 덧댄 것은 늘 그렇다. 양옆 사람의 팔이 하얀 가장자리까지 뻗어 와 거기서 끊겼다. 내민 손은 남았는데, 그 손을 맞잡던 손이 없었다. 바른 사람은 꽤 조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회칠은 딱 사람 하나만큼만 덮었고, 옆 사람들의 손끝은 한 마디도 먹지 않았다.

"끝에 서 있을 줄 알았어요." 에이린이 말했다. "다들 일곱째, 일곱째 하니까요. 맨 끝에 덧붙은 사람이라서, 떼어 내도 줄이 안 무너지는 자리에."

에이린은 옷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렌은 그 종이를 여러 번 보았지만 펼친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누렇게 바랜 바탕에 렌이 모르는 글자가 세 줄로 앉아 있었고, 셋째 줄이 다른 두 줄보다 길었다. 에이린이 소리 내어 읽었다.

"곧은 일곱째는 제 몫을 품에 안고 선다."

거기서 멈췄다. 글줄은 그 뒤로도 손가락 두어 마디만큼 더 이어져 있었다. 렌의 눈이 그쪽으로 가자 에이린은 남은 데를 손바닥 끝으로 가렸다. 렌은 묻지 않았다.

"이 '곧은'이요. 옛 글자로는 한 자인데, 휘지 않았다는 뜻도 되고 거꾸로 서지 않았다는 뜻도 돼요. 우리 집에서는 다 앞의 뜻으로만 읽었어요. 올곧은 일곱째, 맹세를 끝까지 지킨 사람. 그래서 지워진 거라고요." 에이린이 초를 들어 그림 속 둥근 머리들을 비췄다. 머리는 모두 위에 있었다. "그냥 뒤의 뜻이었네요."

렌은 그 말을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한 집안이 한 글자를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읽으며 대를 넘겼다. 렌도 여섯 해 동안 한 수를 한쪽으로만 들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짐값이라고. 짐은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품이면 가슴께겠네요." 에이린은 종이를 옷 안에 도로 넣고 쇠 긁개를 꺼냈다.

긁개 날이 들어가자 회칠이 얇게 일어나 물 위로 떨어졌다. 하얀 가루는 가라앉지 않고 엷게 번져서 검은 수면에 막을 깔았다. 회칠 밑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 아니라 맨돌이었다. 사람 모양으로 쪼여 나간 자리에 끌 자국이 비스듬한 빗금으로 촘촘했고, 그 빗금이 어깨에서 허리까지 고르게 내려갔다. 누군가 흙물로 그린 사람 하나를 벽에서 통째로 파낸 다음, 파낸 자리를 회로 덮은 것이었다.

가슴께에서 빗금이 끊겼다.

손바닥 하나 반만 한 네모가 거기만 매끄러웠고, 둘레의 돌보다 아주 조금 안으로 물러나 있었다. 렌은 손끝으로 네모의 가장자리를 따라가 보았다. 위쪽 두 귀는 벽에 붙어 꿈쩍하지 않았는데, 왼쪽 아래 귀가 손톱 두께만큼 들떠 있었다.

"끼운 돌이야. 긁개 줘."

렌은 들뜬 귀에 날을 밀어 넣었지만 단번에 젖히지는 않았다. 그 귀를 머리카락 한 올만큼 벌린 뒤 날을 빼서 맞은편 귀로 옮겨 또 그만큼 벌렸다. 상자 뚜껑은 한쪽으로만 비틀면 갈라지고, 네 귀를 돌아가며 조금씩 달래면 저 혼자 들린다. 돌도 다르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자 네모가 손가락 하나만큼 벽에서 밀려 나왔고, 렌이 마지막으로 비틀었을 때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 통째로 손에 떨어졌다.

렌은 무릎을 굽혀 그것을 배로 받았다. 이 물에 떨어뜨리면 다시는 못 본다. 벽 밑동, 렌의 허리께에 돌턱이 나 있어서 거기 눕혔다. 돌의 바깥 면에도 빗금뿐이었다. 그 자리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남지 않았다.

에이린이 초를 구멍에 들이댔다.

주먹 둘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었다. 안쪽 네 벽이 평평했고 바닥도 평평했다. 오래 무엇을 담아 둔 자리는 그 물건을 닮게 마련이다. 선반은 항아리 밑동만큼 둥글게 닳고, 칼걸이는 칼날 모양으로 홈이 진다. 이 구멍은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 처음에 무엇을 안고 있었든 그 모양마저 끌로 깎아 네모로 고쳐 놓았다.

에이린이 구멍에 손을 넣었다. 손목까지 들어갔다. 손가락이 안쪽을 한 바퀴 돌고 바닥을 쓸고 나왔는데, 하얀 돌가루만 묻어 있었다. 에이린은 손을 다시 넣어 같은 데를 다시 쓸었다.

"없어."

손이 나왔다. 또 돌가루였다.

"없어. 아무것도. 뭘 안고 있었는지도 안 남겼어. 모양까지 깎았어."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우리 집은 이 종이 하나로 버텼어. 맹약관 문턱에서 돌려보내져도, 문장 박힌 그릇을 하나씩 내다 팔아도, 이게 있으니까 아직 로웬이라고. 다들 이걸 들여다보다가 늙었어. 그런데 누가 먼저 왔어. 우리보다 먼저 와서, 다 긁어 갔어."

렌은 기다렸다.

처음 만난 날부터 에이린의 말은 가끔 이렇게 무너졌다. 그러고 나면 꼭 숨 한 번 사이를 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렌은 그 숨의 길이까지 알았다. 이번에도 숨은 지나갔다. 에이린은 돌가루 묻은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구멍만 보고 있었고,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렌은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도 되는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존댓말은 에이린이 저와 렌 사이에 쌓아 둔 낮은 담이었는데, 그 담이 지금 긁혀 나간 회처럼 물 위에 흩어져 있었다.

위로할 말은 찾지 않았다. 바닥골목에서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지을 줄도 몰랐다. 대신 렌은 에이린이 긁어 낸 자리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회칠이 끊긴 단면에 하얀 켜가 셋 겹쳐 있었고, 켜와 켜 사이마다 머리카락 같은 잿빛 줄이 끼어 있었다.

어느 여름 렌은 성벽 밑 미장이에게 회 포대를 져다 주었다. 미장이는 비가 오면 흙손을 놓고 앉아 투덜댔다. 앞 켜가 덜 마른 데 다음 켜를 바르면 통째로 들뜬다고, 다 마른 켜 위에는 먼지가 앉아 저렇게 줄이 진다고. 볕 드는 담에서도 한 켜에 이틀이었다. 볕이라고는 든 적 없는 이 물 위의 벽이라면 그 두 배는 걸렸을 것이다. 그런 켜가 셋이었다.

"지운 사람, 여기 오래 있었어." 렌이 말했다. "열흘은 넘게."

에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열흘을 여기서 버티려면 먹을 거, 물, 초가 있어야 돼. 그리고 회. 회 포대는 무거워." 말하고 나서야 렌은 그 무게가 제 어깨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누가 지고 내려왔겠지."

지운 사람은 끌을 들었고, 그 곁에서 누군가는 회를 졌다. 일이 끝나고 끌을 든 사람이 별의 길을 열어 나갈 때, 회를 진 사람도 그 길에 같이 들었을까. 렌은 그걸 묻지 않았다. 물을 데가 없었다.

에이린이 초를 낮췄다. 불을 벽에 바짝 붙여 비스듬히 대자 빗금마다 그늘이 졌는데, 그늘 한복판에 가는 밝은 줄이 하나씩 서 있었다. 이 빗금에 하나, 다음 빗금에도 하나. 빗금이 어느 쪽으로 꺾이든 줄은 늘 같은 자리를 지켰다.

"끌 날에 이가 하나 빠졌어." 에이린이 말했다. "빠진 데는 돌이 안 깎이니까, 깎을 때마다 저렇게 등이 남아." 에이린은 한참 그 줄을 보았다. "뒤집힌 정원 기둥. 거기 쪼인 데도 이 줄이 있었어. 그땐 돌결인 줄 알았어."

"같은 끌이네."

"같은 손이야." 에이린이 구멍 가장자리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이 무너지고 나서 지운 걸까. 지워서 우리 집이 무너진 걸까."

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회칠은 날짜를 적어 두지 않았다. 렌은 대신 그 손이 이 벽까지 오는 동안 지나왔을 데를 그려 보았다. 거꾸로 자란 숲, 물에 잠긴 옛길, 자리를 바꾸는 책장들. 렌과 에이린이 오늘 하루 목숨을 걸고 지나온 길을, 그 손은 끌 한 자루를 쥐고 남의 등에 회 포대를 지워 지나갔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이 가는 줄 하나만 빼고.

에이린이 초를 기울였다. 녹은 밀랍이 빗금 하나에 떨어져 고였다. 에이린은 그것이 굳기를 기다려 손톱 끝으로 들어냈고, 손톱만 한 밀랍 조각을 불에 비춰 보았다. 돌에서 등이던 것이 밀랍에서는 가는 골로 패어 있었다. 에이린은 허리에 남아 있던 줄 토막을 풀어 밀랍을 두어 번 감싸고 칼띠에 묶었다.

"그거 팔면 얼마 받아?"

"아무도 안 사.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어야 돼."

그때 물이 떨었다.

처음에는 소리도 없었다. 기둥마다 둘레에 가는 물결이 둥글게 일었고, 물결과 물결이 부딪쳐 엉키면서 회랑의 수면 전체가 잘게 끓었다. 머리 위, 천인들이 한때 딛고 다녔을 바닥에서 돌 갈리는 소리가 길게 끌렸다. 모래가 쏟아져 촛불을 때렸다. 에이린이 초를 가슴께로 끌어당겨 손바닥으로 바람막이를 쳤다. 돌턱에 눕혀 둔 돌이 덜그럭거리며 끝으로 밀려 나갔고, 렌은 엉덩이로 그것을 벽에 눌러 붙인 채 한 손으로 돌턱을, 다른 손으로 에이린의 팔꿈치를 잡았다. 끝 기둥의 횃대에서 아버지의 바구니가 크게 흔들렸다. 렌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보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물이 빠졌다.

무릎에 있던 물이 정강이로, 발목으로 내려가며 복도 가운데 꺼진 쪽으로 끌려갔다. 렌의 발도 같이 끌렸다. 물 위에 깔려 있던 회 가루가 길게 늘어나 어둠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왔다.

물은 무릎을 넘어 허벅지를 쳤다. 단번에 그 높이까지 와서는 물러가지 않았다. 흔들림이 멎고, 회랑에는 물이 기둥을 치는 소리만 남았다.

에이린이 초를 높이 들어 왔던 쪽을 비췄다.

"렌. 길."

렌은 끝 기둥 발치를 보았다. 깊은 물을 건너와 처음 두 발을 함께 디뎠던 자리, 이 회랑에서 마지막까지 물 위에 드러나 있던 돌꽃.

그 자리에 물만 있었다.

돌아갈 길은 그 밑에 있었다. 셔츠 안의 종이는 한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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