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11월 6일(금)
주문서
물은 허벅지에서 멎은 게 아니었다. 렌이 끝 기둥 발치를 내려다보는 동안에도 수면은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조금씩 차올랐다. 물결 하나 없이, 처마 밑 빈 독에 밤새 빗물이 고이듯이. 바구니 밑바닥이 다시 젖어 드는 것을 렌은 등허리로 알았다.
에이린의 초가 왔던 쪽 어둠을 한 기둥씩 더듬었다. 기둥들은 검은 물에서 솟아 줄지어 멀어졌고, 그 사이 어디에도 발 디딜 데는 없었다.
"찢어." 에이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 혼자. 물은 빠지기도 하잖아. 나는 저 돌턱에 앉아서 기다릴게. 나가서 사람을 데려와."
"누구를."
에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렌도 더 묻지 않았다. 이 회랑까지 사람을 내려보내 줄 집이 못머리에 있었다면, 아버지의 바구니가 여섯 해 동안 저 횃대에 걸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렌은 주문서를 꺼냈다. 가슴까지 오는 물을 건너온 종이는 귀퉁이가 눅눅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눌러 찍은 별자리 자국은 엄지 밑에서 오톨도톨 그대로 걸렸다. 탑 문 앞 탁자에서 유스틴이 했던 말을 렌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한 장. 한 사람. 몸에 지닌 것까지. 찢고, 다섯."
한 장에 한 사람. 거기는 다툴 데가 없었다. 렌의 생각이 걸린 건 그다음이었다. 유스틴은 손에 든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든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몸에 지닌 것이라고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물가 선창 앞은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이 된다. 짐꾼들은 거기서 신 아끼는 손님을 업어 짐배까지 건네주고 구리 한 닢을 받는다. 업힌 손님의 신에 진흙이 튀면 그 신값은 짐꾼이 문다. 그러니 삯을 낸 손님은 짐꾼 등에 얹혀 있는 동안 손님이 아니라 짐이었다. 바닥골목에서는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렌은 열 살 때부터 그 삯을 받았다.
"업혀."
에이린이 렌을 보았다.
"짐꾼 등에 얹힌 건 짐이야. 짐꾼이 몸에 지닌 거."
"별지도가 너랑 같은 골목에서 자랐으면 좋겠네."
렌은 대답 대신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겁이 났다. 별의 길이 렌만 데려가고 에이린을 이 물 위에 떨궈 두면, 렌은 탑 문 앞 돌바닥에 빈 등으로 서 있게 된다. 처음 짐을 진 날부터 렌이 제일 무서워한 건 넘어지는 것도 다치는 것도 아니었다. 짐을 놓치는 것이었다.
"삯 내."
"뭐?"
"삯을 받아야 짐이야. 그냥 업으면 그냥 사람이고."
에이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없는 거 알잖아."
"그럼 외상. 내 장부에 달아 둘게."
"너 장부 없잖아."
"방금 생겼어."
"로웬을 외상으로 업는 짐꾼은 네가 처음이야."
에이린은 초를 끝 벽 돌턱에 세웠다. 쪼아 낸 돌이 눕혀진 자리 옆이었다. 그러고는 망토 고리를 풀어 렌에게 내밀었다.
렌은 먼저 바구니를 앞으로 돌려 멨다. 어깨끈에서 팔을 하나씩 빼어 가슴 쪽으로 옮기자 꾸러미 무게가 명치를 내리눌렀다. 렌은 돌턱에 등을 돌리고 무릎을 굽혔다. 에이린이 돌턱을 딛고 렌의 등에 업혔다. 생각보다 가벼웠고, 생각보다 몸이 굳어 있었다.
렌은 망토를 길게 비틀어 에이린의 엉덩이 밑으로 돌리고, 두 끝을 제 어깨 위로 넘겨 바구니 위 쇄골께에서 엇걸었다. 매듭은 바구니에 짓는 것을 쓰지 않았다. 바닥골목 아낙들이 아이를 업을 때 짓는 납작한 매듭이었다. 산 것을 업을 때는 고가 살을 파고들면 안 된다.
"애 업듯이?" 에이린이 귓가에서 물었다.
"애 업듯이."
앞에는 바구니, 뒤에는 사람. 렌은 허리를 펴 보았다. 앞으로 쏟아지려는 꾸러미를 등 뒤의 무게가 붙잡았고, 뒤로 넘어가려는 에이린을 앞의 무게가 붙잡았다. 짐 둘이 서로를 붙들고 있으니 렌은 그 가운데 서 있기만 하면 됐다. 서 있기만.
"무릎 내 옆구리에 붙여. 늘어지면 두 배로 무거워."
렌은 두 손으로 주문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끝 기둥 횃대에 걸린 아버지의 바구니가 보였다. 물은 아직 그 밑에 닿지 않았다.
렌은 종이를 찢었다.
젖은 천을 째는 것처럼 둔한 소리가 났다. 찢긴 자리에서 은빛 점들이 쏟아져 물 위로 떨어졌는데, 물에 닿고도 꺼지지 않았다. 별자리 자국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온 것처럼, 점들은 저마다 제 자리를 지킨 채 수면에 떠 있었다.
"하나."
점들이 렌의 다리로 모여들더니 젖은 바지를 타고, 셔츠를 타고 번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개미 떼가 지나가듯 살갗만 근질거렸다.
"둘."
어깨에서 점들이 멈칫했다. 렌은 숨을 참았다. 이윽고 점들은 망토 매듭을 건너 에이린의 팔로 번졌다. 등 뒤에서 에이린이 짧게 숨을 들이켰고, 렌의 목을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셋."
그 순간 바구니가 렌의 가슴을 끌어내렸다.
누가 물 밑에서 바구니 바닥을 움켜쥐고 당기는 것 같았다. 점들이 버들살을 덮어 내려가다가 꾸러미가 든 바닥께에서 미끄러졌다. 거기만 빛이 비켜 갔다. 렌의 무릎이 꺾였고, 물이 단번에 가슴까지 왔다.
짐꾼은 서서 쉰다. 앉으면 못 일어난다. 렌의 어깨에 처음 짐을 얹어 준 골목 노인의 말이었다. 렌은 꺾인 무릎을 도로 펴서 잠갔다. 정강이가 떨렸다. 왼쪽 어깨끈이 젖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는데, 두 손에는 아직 종이 조각이 쥐여 있었다. 렌은 종이를 놓고 고개를 숙여 끈을 이로 물었다.
"넷."
에이린이었다. 렌의 귓가에서, 렌 대신.
렌은 두 팔로 바구니를 끌어안았다. 받은 짐은 내려놓을 때까지 내 것이다. 렌은 이 짐을 아직 내려놓지 않았다. 빛이 그제야 바구니 밑을 감쌌다.
"다섯."
물소리가 끊겼다. 마지막으로 렌의 눈에 남은 것은 돌턱의 촛불이 겨우 닿는 자리, 끝 기둥 횃대에 걸린 잿빛 바구니였다.
돌이 무릎을 받았다.
찬 바람이 젖은 셔츠를 뚫고 들어왔다. 렌은 바구니를 안은 채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머리 위로 금빛 기둥이 탑을 꿰고 서 있었고, 탑 문 앞 돌바닥이 그 빛을 받아 누렇게 젖어 있었다. 렌은 물고 있던 끈을 뱉었다.
탁자 쪽에서 무엇이 와르르 쏟아졌다. 등잔 옆에 엎드려 졸던 유스틴이 벌떡 일어나다 붓통을 엎은 것이었다. 뺨에 장부 모서리 자국이 붉게 찍혀 있었다. 유스틴은 렌을 보고, 렌의 어깨 너머에서 매듭을 더듬는 에이린의 손을 보았다.
"한 장." 유스틴이 말했다.
매듭이 풀리자 에이린이 렌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비틀거렸다.
"두 사람."
"하나는 짐이야." 렌이 말했다.
유스틴은 한참 렌을 보다가 바닥에서 붓을 주워 들었다. 렌이 일어서려고 바구니를 고쳐 안는데, 바구니 아가리로 꾸러미 한 귀퉁이가 비죽 나와 있었다. 열십자 끈이 만나는 자리의 납이 등잔불을 받아 둔하게 빛났다. 붓끝이 장부 위에서 멎었다.
"일레스."
렌은 납에 금 간 데가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꾸러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구니를 등으로 돌려 메는 동안 유스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붓은 렌이 짐작한 것보다 한 줄을 더 내려갔다.
둑길은 아침보다 길었다. 에이린은 반 걸음 뒤에서 저린 다리를 끌며 따라왔고, 둘 다 말이 없었다. 렌은 걸으면서 등불을 셌다. 셀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 둑길에 서면 눈이 저절로 그렇게 했다. 서른일곱에서 끝났다. 렌은 아침의 수를 떠올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 등에 얹힌 것만으로도 셀 것은 넘쳤다.
바닥골목 어귀에는 기름을 아끼느라 등을 하나만 켜 두는데, 그 밑에 토빈이 뒤집은 생선 상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나왔네." 토빈이 하품을 반쯤 삼켰다. "날 바뀌도록 안 나오면 네 이름 옆에 점 하나 찍고 들어가려고 했고."
토빈이 장부를 렌 쪽으로 돌려 등불에 비췄다. 렌의 줄이었다. 맨 앞에 아버지 이름이 있고, 그 옆에 은화 백서른여섯 닢, 그 밑으로 여섯 해치 이자가 깨알같이 이어지다가 맨 끝에 늦은 값이 한 줄 새로 붙어 있었다. 먹이 아직 번들거렸다.
"이자 날은 스물넷째 날이고."
렌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토빈의 장부에서 그 수는 잃어버린 짐의 값이었다. 렌의 등 뒤 바구니 안에서는 같은 수가 나무패에 새겨진 채 납 봉인 밑에 매달려 있었다.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는 짐이었다. 토빈은 알았을까. 렌은 토빈의 얼굴을 보았지만, 거기서 읽을 수 있는 건 졸음뿐이었다.
토빈이 장부를 덮고 일어섰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무겁게 지고 왔네."
렌이 자는 방 흙바닥에서 에이린은 망토를 둘러쓰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망토는 아직 축축했다. 한참 뒤에 그 속에서 목소리가 났다.
"외상, 갚을게요."
"응."
렌은 그제야 바구니를 벗었다. 몸에서 아주 떼어 놓는 건 아침에 둑길로 나선 뒤로 처음이었다. 어깨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가볍게 떴다. 렌은 바구니를 무릎 앞에 놓고 벽에 등을 기댔다.
아버지는 짐을 넘기지도 않았고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물이 닿지 않는 높이에 바구니를 거는 사람은 그걸 다시 질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섯 해 동안 그 바구니를 다시 지지 않았다. 빚이라면 끝낼 길이 이제 렌의 무릎 앞에 있었다. 렌을 탑으로 다시 데려갈 것은 토빈의 장부가 아니었다. 3층까지만이라던 아버지의 말이 실은 어디서 끝났는지, 렌은 그걸 알아야 했다.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소리가 났다. 마른 버들이 흙을 긁는 소리였다.
렌은 눈을 떴다. 바구니가 무릎 앞에 없었다. 한 뼘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렌이 숨을 죽이고 보는 앞에서, 바구니는 손톱만큼 또 흙바닥을 긁으며 문 쪽으로 밀려갔다.
아무도 끌지 않는데, 호수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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