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탑 · 목록

13화 · 11월 7일(토)

장부

렌을 깨운 건 손목이었다.

잠들기 전 바구니 끈을 손목에 두 번 감아 두었는데, 눈을 떴을 때 팔이 문 쪽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누가 문밖에서 손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바구니는 팔 길이만큼 떨어진 문턱 앞에 놓여 있었고, 끈은 밤새 그랬던 듯 한쪽으로만 팽팽했다. 선창 말뚝에 맨 짐배가 물살 쪽으로 밧줄을 당기고 있을 때처럼. 렌이 팔을 굽히면 바구니는 순순히 끌려왔다. 힘을 빼면 다시 문 쪽으로, 그 너머 호수 쪽으로 갔다.

벽 쪽 자리는 비어 있었다.

망토도 칼도 없었다. 에이린이 돌아누웠던 흙바닥이 등 모양으로 얕게 눌려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은화 두 닢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흘린 게 아니었다. 누가 손가락으로 꾹 눌러 반쯤 흙에 묻어 두었다. 굴러가지 말라고, 아니면 잠든 렌 말고 다른 손이 쉽게 줍지 못하라고.

말 한마디 없었다. 글 한 줄도 없었다. 집안 대대로 종이 한 장을 품고 버텼다던 사람이 렌에게는 쇠붙이 두 개만 남기고 갔다.

렌은 바로 집지 않았다. 남이 두고 간 것은 만지지 않는다. 바닥골목 짐꾼이 맨 처음 배우는 것이다.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다가, 렌은 이게 두고 간 것이 아니라 치르고 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물에 잠긴 회랑에서 탑 문 앞까지 등에 얹혀 건너간 삯. 그런 길에 매길 시세는 바닥골목 어디에도 없었다. 에이린은 그 값을 혼자 정하고, 정한 대로 놓고 갔다.

흙을 긁어 은화를 꺼내자 손톱 밑이 까맣게 찼다. 렌은 두 닢을 셔츠 안, 주문서가 있던 자리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이 싫었다. 두 닢이면 스물넷째 날 이자에서 구리 열둘이 모자란다는 생각. 받은 삯보다 갚을 셈이 먼저 떠올랐다.

해가 뜨자 렌은 바구니를 지고 선창으로 나갔다. 끈을 손목에 감은 채 방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고, 바구니를 두고 나갈 수는 더욱 없었다.

물가 선창에는 벌써 짐배가 들어와 있었다. 짐꾼들은 뱃전 아래 한 줄로 서서 배 주인이 삯 부르기를 기다렸다. 렌이 줄 끝에 가 서자 앞에 선 등들이 하나씩 돌아보았다. 돌아본 눈들은 렌의 얼굴에서 멈추지 않고 어깨 너머로 갔다.

"봉인째 들고 나왔다며."

렌보다 두 해 먼저 짐을 진 녀석이었다. 렌이 대답하지 않자 줄 여기저기서 말이 붙었다. 일레스 상회 짐을 통째로 들고 나왔다더라. 탑 문 앞 필경사가 장부에 적는 걸 새벽에 주문서 사러 간 용병들이 넘겨다봤다더라. 안에 천인 금이 들었다더라. 아니, 상회가 탑에 빠뜨린 장부 원본이라더라.

렌은 그 말들을 등으로 들었다. 탑 문 앞에서 유스틴의 붓이 한 줄을 더 내려가던 게 떠올랐다. 어젯밤 렌이 입을 연 건 에이린에게 '응' 한 번뿐이었는데, 소문은 렌보다 먼저 둑길을 건너와 렌이 자는 동안 골목을 다 돌고 선창 계단 밑에서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뱃전에서 배 주인이 렌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너는 빠져. 상회 봉인 진 놈한테 내 젓갈 독 못 얹는다. 그 안에 뭐가 들었든 내 독까지 엮이긴 싫다."

렌은 줄에서 나왔다. 오늘 삯은 그걸로 끝이었다. 물 쪽을 보고 서 있으니 등 뒤의 바구니가 렌을 앞으로 떠밀었다. 렌은 물가에서 세 걸음 물러섰다.

토빈은 그때 왔다.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렌이 처음 보는 덩치 둘을 데리고 선창 계단을 내려왔다. 덩치들은 상회 창고 앞에서 상자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팔짱을 끼고 섰다. 짐꾼들이 길을 터 주었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부터 구경꾼이 많고." 토빈은 계단 끝 말뚝에 엉덩이를 걸치고 장부를 무릎에 펼쳤다. "상회에서 새벽같이 사람이 왔고. 네 줄에 쓸 게 생겼어."

토빈은 붓에 먹을 찍었다. 렌의 줄, 어젯밤 붙은 늦은 값 밑으로 글자가 하나씩 앉았다. 토빈은 선창 끝까지 들리게 소리 내어 읽으며 썼다.

"짐을 넘기면 아버지 짐값 은화 백서른여섯 닢과 그 이자를 지운다." 붓이 다음 줄로 내려갔다. "안 넘기면 짐 훔친 짐꾼으로 맹약관에 올린다."

토빈이 젖은 글자 위로 입김을 후 불었다.

선창이 조용해졌다. 짐 훔친 짐꾼. 바닥골목에서 그 말이 한 번 붙은 사람은 선창에도 성문 앞에도 다시 줄을 서지 못한다. 맹약관까지 갈 것도 없었다. 골목에 그 말이 한 바퀴 돌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넘기면 끝이었다.

여섯 해였다. 이자 날마다 구리를 긁어모으던 일, 아버지 이름 옆에 붙은 그 수. 그 수가 지워진다는 말을 렌은 열두 살 때부터 꿈에서나 들었다. 꿈에서는 늘 그 말 뒤에 아무것도 없었다. 깨어서 들으니 그 뒤에 남는 게 있었다. 3층 횃대에 걸린 잿빛 바구니. 그리고 아버지가 어디서 멈췄는지 모르는 채로, 빚 없는 몸으로 늙어 가는 일.

"짐은 상회 거고." 토빈이 붓을 든 채 기다렸다. "상회가 돌려 달라면 돌려주는 거고."

"받은 짐은 내려놓을 때까지 짐꾼 거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짐꾼 몇이 고개를 들었다.

"짐이 길에서 젖으면 짐꾼이 물어. 깨져도 짐꾼이 물고, 잃어버려도 짐꾼이 물어. 짐꾼 거니까. 상회가 그렇게 정했잖아. 여섯 해 동안 나한테서 받아 간 게 그 돈이야." 렌은 숨을 한 번 골랐다. "짐꾼 거라서 물어내라고 했으면 지금도 짐꾼 거야. 길 중간에 짐 임자가 와서 도로 내놓으라는 법은 없어."

"길 중간." 토빈이 그 말을 되받았다. "여섯 해 걸리는 길도 있나."

"짐표에 적혀 있어."

렌은 바구니를 앞으로 돌리지 않았다. 나무패에 무엇이 새겨졌는지는 어젯밤에 이미 외웠다.

"셋째 층. 내려놓을 것."

누가 웃으려다 말았다. 짐꾼들은 다 알아들었다. 받는 사람 이름 대신 내려놓으라는 말만 적힌 짐. 받을 사람이 없는 데로 보내는 짐이었다. 그런 짐을 지고 간 사람은 거기서 무엇을 받아 오나.

"행선지가 참말이면 난 이걸 셋째 층에 갖다 놔야 돼. 그럼 아버지는 짐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직 덜 간 거야. 상회는 받을 짐값이 없어." 렌은 토빈의 붓끝을 보았다. "거짓말이면, 속인 짐은 그 자리에 내려놔도 돼. 그것도 짐꾼 규칙이야. 그럼 난 내가 정한 데 내려놓을 거야."

"어디."

"맹약관 앞. 아저씨가 날 올리겠다는 데."

말을 끝내고 나서야 무릎 뒤가 저려 왔다. 렌은 그게 바지 위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토빈은 한참 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덩치들을 보았다. 덩치 하나가 렌 쪽으로 반 걸음 나섰다. 토빈이 붓 든 손을 들자 그 발이 멎었다. 선창의 짐꾼들이 그 반 걸음을 다 보았다. 남의 등에 얹힌 짐에 손대는 일을 바닥골목은 도둑질보다 오래 기억한다. 내일 아침 상회 짐배가 들어왔을 때 뱃전 아래 줄 서는 짐꾼이 없으면, 그건 렌의 빚이 아니라 토빈의 빚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럼 정하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와. 이자 받으러 어차피 올 거잖아."

토빈은 붓을 든 채 오래 있었다. 그러다 새 줄 끝에 몇 자를 더 붙였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렌은 몸을 기울여 그 글자를 읽었다.

스물넷째 날 이자 날까지.

사흘이었다. 토빈은 장부를 덮고 일어섰다. 계단 중간에서 한 번 돌아보았는데, 렌이 아니라 렌의 등에 진 바구니를 보았다. 놀란 얼굴인지 이미 알던 얼굴인지 렌은 가려낼 수 없었다.

덩치들이 계단 위로 사라지자 선창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무도 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젓갈 독을 지고 렌 곁을 지나가던 짐꾼 하나가 걸음도 늦추지 않고 렌의 바구니 테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짐 잘 지라는 뜻이었다. 짐꾼끼리 하는 인사는 그것밖에 없었다.

한낮 내내 렌은 바구니를 진 채 우물가와 용병 골목 어귀를 돌며 칼 찬 로웬 아가씨를 못 봤느냐고 물었다. 성문 안쪽 길목에서 물장수 노인 하나가 봤다고 했다. 해 뜨기 전, 성안으로 들어가는 비탈길이었다고. 칼은 천에 둘둘 싸서 품에 안고 가더라고.

렌은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삯을 치른 손님을 쫓아가는 짐꾼은 없다. 삯이 건너오면 짐은 거기서 내려진 것이다. 렌은 흙에 반쯤 묻혀 있던 두 닢을 생각했다. 굴러가지 말라고 눌러 둔 게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해가 기울 무렵 렌은 바닥골목 어귀로 돌아왔다. 기름을 아끼느라 하나만 켜 두는 등 밑, 어젯밤 토빈이 깔고 앉았던 생선 상자는 비어 있었다. 호수 쪽에서 둑길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먼 끝에서부터 하나씩, 물 위에 노란 그림자를 떨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렌의 눈이 늘 하던 대로 첫 등불에 가서 앉았다. 혀끝이 윗니 뒤에 닿았다. 하나, 하는 소리가 거기서 굴러 나올 참이었다.

렌은 그것을 삼켰다.

여섯 해 동안 렌은 이 자리에서 저 길을 세었다. 하나가 늘면 누가 걸어 나올 길이 밝아지는 것 같았고, 하나가 줄면 어두워진 데를 알아 두는 것 같았다. 다 세고 나면 기다리는 하루가 끝났다. 그런데 이제 렌은 알았다. 아버지는 저 길로 걸어 나오지 않는다. 그 끝이 어디였는지 알고 싶으면 렌이 저 길을 건너가야 했다. 등 뒤의 바구니도 같은 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렌은 등불에 등을 돌렸다. 둑길이 보이는 데 서서 등불을 세지 않은 저녁은, 렌이 기억하는 한 처음이었다.

방에 돌아와 렌은 초를 한 자루 켰다. 탑에 지고 들어갔다가 도로 지고 나온 초였다. 끈을 다시 손목에 감고, 꾸러미를 바구니 아가리까지만 당겨 냈다. 다 꺼내지는 않았다. 꺼내 놓으면 이것이 저 혼자 어느 쪽으로 가려 할지, 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열십자 끈이 만나는 자리의 납을 렌은 그제야 처음으로 들여다보았다. 탑 문 앞에서도 어젯밤에도 금이 갔는지만 봤지, 무엇이 찍혔는지는 보지 않았다. 일레스 상회의 각인은 바닥골목 짐꾼이면 눈을 감고도 안다. 아가리를 끈으로 조인 주머니. 렌이 지고 나른 상자의 절반은 이마에 그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주머니는 납 한가운데에 있지 않았다. 한쪽으로 비껴 찍혀서, 맞은편 가장자리에 납이 초승달만큼 남아 있었다. 거기에 선이 있었다.

둥근 테두리 한 토막. 그 위로 솟은 뾰족한 끝 둘. 테두리는 주머니 쪽으로 가다가 주머니 밑으로 들어가 뭉개졌다. 셋째 끝이 있었다면 그것도 거기 깔렸을 것이다.

렌은 초를 더 가까이 댔다. 촛농이 손등에 떨어졌는데 뜨거운 줄도 몰랐다.

납 한 덩이에 도장은 하나다. 짐꾼이면 누구나 그렇게 안다. 이 납은 두 번 눌렸다. 누군가 먼저 찍었고, 일레스는 그 위에 제 주머니를 눌렀다. 반을 덮고, 반은 덮지 못한 채로.

렌이 여섯 해 동안 지고 나른 어느 상자의 이마에도 그런 모양은 없었다. 이 짐을 먼저 봉한 손은 일레스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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