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11월 8일(일)
유물 시장
장부에는 접시가 하나뿐이었다.
토빈의 장부에서 은화 백서른여섯 닢은 잃어버린 짐의 값이었다. 상회가 매기고 상회가 적은 수였다. 그 수와 맞대어 달아 볼 물건이 지금 렌의 등에 있었는데, 정작 렌은 그게 얼마짜리인지 몰랐다. 넘기면 빚을 지워 주겠다는 말은 저울 한쪽에 추만 잔뜩 얹어 놓고 이만하면 맞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맞은편 접시에 무엇이 얹혔는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다.
그래서 스무이튿날 아침, 렌은 바구니를 지고 유물 시장으로 갔다. 팔 생각은 없었다. 값만 들을 생각이었다.
시장은 성문 안, 맹약관으로 가는 비탈 중턱에 있었다. 비탈에 들어서자 바구니가 뒤에서 렌을 잡아당겼다. 꾸러미는 여전히 호수 쪽으로만 가려 했고, 호수는 이제 렌의 발뒤꿈치 아래 멀리 깔려 있었다. 렌은 젖은 가마니를 지고 둑을 넘을 때처럼 허리를 접고 발가락 끝으로 돌길을 찍었다. 무게가 밑으로 걸리지 않고 뒤로 걸리는 짐은 처음이었다. 물동이를 이고 내려오던 아낙이, 가벼워 보이는 바구니 하나에 웬 용을 그리 쓰느냐는 눈으로 렌을 흘끗 보고 지나갔다.
좌판마다 놋쇠 저울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탑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이 시장에서 먼저 저울에 얹혔다. 천인들이 섬을 묶던 은사슬 고리 한 마디도, 모서리가 깨진 별빛 유리 조각도, 물에 불어 한 덩이로 엉겨 붙은 서고 책장 뭉치도. 무게가 먼저 나오고 이름은 나중에 붙었다. 렌은 이 시장에 상자를 수없이 져다 날랐기 때문에 그 순서를 알았다.
첫 좌판은 유리 장수였다. 지난봄 내내 렌이 유리 상자를 져다 준 집이었다. 렌이 입을 떼기도 전에 유리 장수는 저울 접시를 들어 좌판 위에 엎었다. 놋쇠가 나무판에 닿으며 둔하게 울렸다.
시장 사람들은 장사를 접을 때 그렇게 한다. 비 오는 저녁이나, 상갓집에 가는 날에. 해가 아직 처마 끝에 걸린 아침에 접시를 엎는 장수는 없었다.
렌이 다음 좌판으로 가자 거기서도 접시가 엎어졌다.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렌이 닿기도 전에 서너 좌판 앞에서 먼저 소리가 났다. 놋쇠가 나무를 치는 소리가 비탈 위쪽으로 차례차례 번져 가는 동안 장수들은 저마다 사슬을 닦거나 장부를 넘기거나 하늘을 보았다. 렌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없었고, 렌의 어깨 너머를 보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시장 맨 끝, 맹약관 담장 그늘에 베사의 좌판이 있었다. 베사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남의 물건을 달아 주고 무게 값을 받는다. 렌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베사는 접시를 엎지 않았다. 다만 렌이 앞에 서자 렌의 얼굴은 건너뛰고 바구니를 아래위로 한 번 훑었다.
"기름 가죽에 열십자 끈, 납 봉인." 렌이 말했다. "내 팔뚝만 해. 이런 거 여기서 얼마쯤 해?"
"보여 달라곤 안 할게." 베사가 말했다. "보면 나도 본 사람이 되니까."
그녀는 추 상자에서 제일 작은 놋쇠 추를 집어 렌의 손바닥에 거꾸로 올려놓았다. 추 밑바닥에 일레스의 주머니가 찍혀 있었다.
"이 시장 추는 다 그 집 거야. 빌려다 쓰고 철마다 빌린 값을 내지. 그 집 추로 그 집 봉인을 달면 얼마가 나오겠니."
"그 집이 부르는 만큼."
"그러니 아무도 안 부르는 거야." 베사가 추를 도로 집어 갔다. "그 집은 벌써 불렀다며. 네 줄에다."
추 밑바닥의 찬 기운이 손바닥에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렌은 그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맞은편 접시를 알아보러 왔는데, 이 시장에서는 맞은편 접시에도 같은 집 추가 얹혀 있었다.
비탈을 내려오면서 렌은 못머리에서 일레스 추로 달지 않는 값을 하나 떠올렸다. 세렌가가 매기는 값. 탑 문 앞 탁자에서 파는 종이 한 장의 값. 그 탁자에는 스무날 밤 유스틴의 붓이 렌의 이름 밑으로 한 줄 더 내려가 적은 무언가도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바구니가 렌을 떠밀었다. 렌은 버티지 않고 그 걸음에 실려 둑길까지 갔다.
탑 문 앞 탁자에는 용병 몇이 줄을 서 있었다. 유스틴은 한 사람씩 이름을 받아 적고, 별자리 자국이 찍힌 종이를 한 장씩 내주고, 은화를 받아 탁자 밑 궤짝에 떨궜다. 렌은 줄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스무날 밤에." 렌이 말했다. "내 이름 밑에 한 줄 더 썼지."
유스틴이 장부를 렌 쪽으로 돌렸다. 렌의 줄이 있었다. 들어간 날 스무날 아침, 주문서 한 장, 나온 날 스무날 밤, 두 사람. 그 끝에 작은 글씨로, 하나는 짐, 짐꾼 말. 그 밑에 한 줄이 더 있었는데 렌이 모르는 글씨였다. 획이 짧고 빽빽해서 글자라기보다 바늘땀 같았다.
"일레스 봉인." 유스틴이 읽었다. "그 밑에 하나 더. 반쪽."
렌은 숨을 멈췄다. 어젯밤 초를 코앞까지 대고서야 겨우 찾은 것을, 이 사람은 등잔불 아래 납 귀퉁이 한 번 보고 적어 두었다.
"그게 뭔데. 얼마짜리야."
"값. 모름."
"모르면서 왜 적었어."
"본 것. 적는 게 일."
렌은 장부를 내려다보다가 다른 것을 물었다. 비탈을 내려오는 내내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이었다.
"여기 적은 건 안 버리지."
"안 버림."
"여섯 해 전 것도."
유스틴이 처음으로 렌의 얼굴을 보았다. 렌은 아버지가 나간 날을 댔다. 렌이 날짜로 외는 날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토빈이 이자 날마다 펼쳐 보이는 차용증 맨 윗줄, 아버지 이름 바로 위에 적힌 날.
유스틴은 대꾸 없이 일어나 탁자 뒤 돌벽에 파인 벽감으로 갔다. 끈으로 묶은 장부 묶음이 벽감 천장까지 차 있었다. 유스틴은 고르는 기색도 없이 아래에서 몇째 묶음을 끌어냈다. 표지에 물 얼룩이 번져 있었다. 탁자로 돌아와 장을 넘기는 동안, 렌은 넘어가는 장마다 같은 낱말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일레스. 읽으려던 게 아니었다. 그 글자만은 렌이 글을 깨치기 전부터 알았다.
장이 멎었다.
날짜가 있었다. 그 밑에 일레스 상회. 그 밑에 이름 셋. 렌은 둘째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 이름이 차용증 아닌 데 적힌 것을 렌은 처음 보았다. 이름마다 같은 말이 붙어 있었다. 셋째 층.
그 옆 주문서 칸이 비어 있었다. 세 줄 다. 더 옆, 나온 날 칸도 비어 있었다.
유스틴이 붓대 끝으로 빈칸을 하나씩 짚었다.
"주문서. 없음. 셋 다."
렌은 그 값을 알았다. 스무날 아침 이 탁자 앞에서 들은 값이었다. 부르지 않아도 셈이 저절로 굴러 나왔다. 석 장이면 얼마. 그걸 백서른여섯 닢에서 빼면.
렌은 거기서 셈을 놓았다.
뺄 게 없었다. 상회는 짐에 은화 백서른여섯 닢을 매겼고, 그 짐을 진 사람에게는 구리 한 닢도 매기지 않았다. 짐표에는 셋째 층에 내려놓으라고 적었다. 내려놓은 다음 짐꾼을 어디로 데려오라는 말은 짐표에도, 이 장부에도 없었다. 셋은 처음부터 돌아올 셈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 놓고 상회는 여섯 해 동안, 돌아오지 않은 짐값을 열두 살짜리한테서 받아 갔다.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보낸 사람의 아들한테서.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무엇을 하겠다고 정한 적은 없었다. 몸이 먼저 돌아섰다.
바구니가 탑 문 쪽으로 기울었고, 렌은 처음으로 그쪽에 몸을 맡겼다. 셋째 층, 내려놓을 것. 그렇다면 내려놓아 주면 된다. 지금, 이 걸음으로. 그러면 아버지는 짐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늦게 갖다 놓은 사람이 되고, 토빈 장부의 그 줄은 받을 데가 없어진다. 문 앞에서 종이를 펴 보던 용병 하나가 렌의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길을 비켰다. 문턱이 눈앞이었다. 문 안 어둠에서 찬 기운이 바짓단으로 스며들었다.
등 뒤에서 붓이 종이를 긁었다.
"스무이튿날."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적는 대로 읽는 소리였다.
"바닥골목, 렌. 일레스 짐. 셋째 층."
붓이 먹을 찍는 동안 말이 끊겼다.
"주문서. 없음."
렌의 발끝이 문턱에 걸린 채 멎었다.
방금 본 줄이었다. 날짜가 다르고 이름이 하나일 뿐인, 같은 줄. 이 문턱을 넘으면 렌의 이름은 아버지 이름이 든 줄과 꼭 같은 꼴로 장부에 남을 것이고, 나온 날 칸은 비어 있을 것이고, 몇 해 뒤 누군가 그 빈칸을 붓대로 짚을 것이다. 렌을 여기까지 걸어오게 한 것이 화였는지 등 뒤에서 기울어 있는 바구니였는지, 렌은 가려낼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회의 셈 안이었다.
렌은 문턱에서 발을 거두었다. 돌아서는 렌의 등을 바구니가 한 번 잡아챘다.
탁자로 돌아오자 유스틴은 렌의 새 줄 끝에 한 낱말을 더 붙였다. 돌아섬.
"값이라도 말해 줘." 목소리가 생각보다 갈라져 나왔다. "무슨 값이든. 그래야 내가 뭘 지고 있는지 알 거 아냐."
"값. 모름." 유스틴은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하나를 보탰다. "읽는 손. 앎."
"누구."
"밑의 반쪽. 누른 자국 아님. 끌로 판 것. 새김." 유스틴이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상인 솜씨 아님."
"그러니까 누구."
"새김족. 바렌가 대장간 골목."
대장간 골목이라면 렌도 안다. 어귀까지 숯 가마니를 져다 준 적이 있었다. 그 안으로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새김족은 짐꾼을 쓰지 않는다. 쇳덩이도 숯도 제 등으로 진다.
"새김족은 말을 안 한다며."
"말 대신 새김." 유스틴은 펼쳐 둔 제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읽거든. 한 줄. 여기."
값 대신 내건 값이었다. 렌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스틴이 오래된 장부를 덮으려다 손을 멈췄다. 렌의 눈이 그제야 아버지 줄의 글씨로 갔다. 획 끝을 바늘처럼 짧게 끊어 내는 버릇. 렌의 이름이 든 줄을 적은 것과 같은 손이었다.
"그날도 이 자리." 유스틴이 말했다.
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아비. 한 장 값 물었음." 유스틴은 렌이 아니라 탑 문을 보고 있었다. "듣고, 안 샀음."
그 눈이 문턱에 가서 머물렀다.
"그러고 저기까지. 방금 네 걸음으로."
렌의 등 뒤에서 바구니가 또 문 쪽으로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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